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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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5월 8일 음력4월 초하루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4-05-08
義相祖師法性偈 이야기② 의상조사법성게 이야기②--法性圓融無二相 ----법성원융무이상-- 안녕하십니까? 갑진년 4월 초하루 진관사 법문입니다. 오늘 법문은 의상조사 법성게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법문 내용은 뭐냐.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법성원융무이상, 그 게송이거든요. 시작을 딱 하고 이 손을 한번 이렇게 펴보세요. 이렇게. 그러면 법성원융무이상 한 번 할 때 엄지 손가락 한 번 굽히고, 두 번 할 때 굽히고 세 번, 네 번, 5번, 6번, 7번, 8번, 9번, 10번 하고, 이제 딱 치고 마치고. 그런 식으로 시작을 해보겠습니다. 법성원융무이상 법성원융무이상 법성원융무이상 법성원융무이상 법성원융무이상 법성원융무이상 법성원융무이상 법성원융무이상 법성원융무이상 법성원융무이상 법문이 다 됐는데요. 이게 뭔 말이냐 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셨다. 깨달았다, 알지 못하던 걸 알았다는 얘긴데, 그거는 여러 가지로 설명이 되는데, 이 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이 법성을 알았다, 이렇게 설명되는 게 화엄경이에요. 법성을 알았다. 始成正覺 窮證法性시성정각 궁증법성海印三昧 諸佛智光해인삼매 제불지광眞記云 法性者 微塵法性 須彌山法性 一尺法性 五尺法진기운 법성자 미진법성 수미산법성 일척법성 오척법性 若約今日 五尺法性論者 微塵法性 須彌山法性等 不성 약약금일 오척법성론자 미진법성 수미산법성등 부動自位 稱成五尺 不增小位 不減大位 而能成也동자위 칭성오척 부증소위 불감대위 이능성야(叢髓錄권1. 韓佛全6-776下)(총수록권1, 한불전6-776하) 그러면 법성이란 뭐냐. 존재 만법의 진실상. 존재는 뭐냐. 눈에 보이는 거예요. 어려운 게 아니라 귀에 들리는 거, 손에 만져지는 거. 그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그것이 법인데, 그걸 만법이라고 하거든요. 만가지 법. 그 만 가지 법을 우리 몸으로 말할 때는 오온법이고, 눈코귀로 말하면 안이비설신의고, 그 눈코귀 대상을 말하면 색성향미촉법이고, 뭐 이거 한도 없어요. 하여튼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것이 법인데, 그 법에 진실상이 뭐냐 이거예요. 다 보고 살고, 듣고 살고, 느끼고 사는데, 보고 듣고 느끼는 대상의 진실상이 뭐냐, 그걸 깨달았다는 거예요. 그걸 법의 진실상이라고 하는, 실상이라고도 하지만 성이라고 하거든요. 한마디로 성품 성자. 성은 실상이라는 뜻이에요. 진실할 실자, 모양 상자. 진실한 모양. 법의 진실상이 뭐냐. 그걸 깨달았는데, 시성정각(始成正覺)에, 처음으로 정각을 이룰 적에, 궁증법성(窮證法性)하니, 궁이라고 하는 거는 궁극적이라는 궁자가 있어요. 증이라고 하는 건 증득할 증자가 있는데, 그건 깨달았다, 마음으로 얻었다 할 때 증자를 쓰거든요. 법의 궁극적인 실상을 마음으로 조금도 모자람이 없이 다 깨닫고 나니까, 그것이 뭐와 같으냐. 해인삼매(海印三昧)와 같더라. 해인, 바다에 삼라만상이 다 백지 도장 찍히듯이 찍혀서 보이는데 그걸 해인이라고 그러거든요. 백지에 도장 찍히듯이 바닷물 속에 환히 모든 게 다 보여. 근데 바닷물에 들어가면 없어요. 바닷물에 북두칠성도 보이고, 해와 달과 별도 보이고, 산도 보이고, 모든 것이 다 보이는데, 보이기는 보이는데 바닷물에 들어가면 그게 없어. 오직 바닷물일 뿐이야. 근데 바닷물 속에는 모든 게 다 보여. 그와 같다. 그것은 뭐냐. 깨닫고 나니까 법은 없다. 법은 없어. 무법이야, 무법. 뭐만 있느냐, 지혜광명만 있다. 해인삼매로 제불의 지광(諸佛智光)이 되었다. 지혜광명이 되었다. 깨닫고 나니까 깨달은 지혜뿐이고 지금까지 보이고 들리고 하는 건 없어요. 그러면 지금까지 보이고 들린 건 뭐냐. 바닷물 속에 비추어진 그림자와 같다. 보이기는 보이는데 쫓아가면 없어. 근데 난 이 경 보면서, 그전에 뭔 생각이 났냐 하면 그런 생각이 났어요. 우리 그 강강수월래라고 하는 게 있잖아요. 강강수월래 하는데, 그게 내가 할 때는 강강에, 강마다 강마다 물속에 달이 왔다. 강마다 강마다 수월래, 물속에 달이 왔다. 해인삼매를 얘기하는 것 같더라고. 강강수월래, 강마다 강마다 물속에 달이 왔다. 수월인 거예요. 이 세상 모든 게. 이것도, 이 몸도 물속에 비친 달이고, 죽음도 물속에 미친 달이고, 삶도 물속에 비친 달이고, 항상 그걸 환히 보고 계시는 게 해인삼매거든요. 그거는 바로 지혜 광명이다. 그러니까 범부는 법만 아는데, 법, 지혜를 모르는데, 법만 아니까 눈에 보이면 보이는 대로 살고, 들리면 들리는 대로 살고, 느끼면 느끼는 대로 살고, 이거 법뿐이 없는 거예요. 법밖에. 그 법을 보는 지혜는 없는 거예요. 단법무지라, 법뿐이고 지혜는 없다. 그런데 이게 법의 진실상을 깨닫고 보니까 단지무법이라, 다만 지혜뿐이고 법은 없다. 그게 왜 그런가 하니, 이걸 딱 보면 이걸 보는 지혜가 있어요. 근데 범부는 이것만 알고 이걸 보는 지혜는 모르는 거예요. 근데 이 법의 진실상을 깨달은 삼세제불은 이 모양을 보면, 이 모양은 지혜의 물속에 비추어진 달과 같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걸 깨보면 이 자체가 없고, 이건 완전히 수월이다. 물속에 비친 달이다. 그러면 이게 뭐냐. 물뿐이라는 거예요. 이 물속에 비친 달은 없고. 그래서 이걸 딱 진실상을 보면 이 보이는 물체는 없고 보는 지혜밖에 없다. 아 이거, 참 답답하네. 정말 답답해, 정말 답답해요. 그런데 이 물속에 비친 달이 보이지만 없다 이거거든요. 보이지만 없다. 그래서 그거를 설명한 게 원융무이상이에요. 보이는 건 왜 보이느냐, 없는 건 왜 없느냐, 이걸 설명한 게 원융무이상이라. 원융이라는 거는 하나도 생긴 것이 없이 생기는 걸 원융이라 그래요. 그게 뭔 소리냐 하면, 아까 했잖아요. 하나(엄지손가락을 접어보이며) 그런데 이게 하나가 아니거든요. 그냥 손이지, 근데 인연 따라 하나가 됐어요. 하나 그러면 이게 하나가 되면 다음 건 둘이 될 수밖에 없어요. 다음 이게 또 둘이 되면 그다음 건 셋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다음에 넷이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다음에 다섯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이 하나가 제 자리를 지키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서 이 마지막 거를 다섯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게 하나 자리가 없으면 다섯이 안 되거든. 그러니까 이놈은 그냥 가만히 있는데 다섯이 된 거예요. 새끼손가락은 새끼손가락일 뿐인데 이게 다섯이 됐어. 뭐 때문에 다섯이 됐냐. 이 엄지손가락 때문에. 그래 엄지손가락에 의해서 새끼손가락은 다섯 번째가 되고, 또 새끼손가락에 의해서 엄지손가락은 첫 번째가 된 거예요. 이래서 원융이라는 건 다 제자리 제자리에 다 있어서 하나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그 전체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걸 원융이라 그래요. 그러면 강강수월래를 본다면 사람들이 손을 맞잡고 있으면 둥그런 원이 돼 있잖아요. 그러면 사람 하나하나 보면 둥그런 게 없어요. 하나하나 사람일 뿐이야. 근데 손을 맞잡으면 하나하나 사람이 둥근 걸 만들어낸 거예요. 근데 사람 하나하나에는 둥근 게 없어. 이걸 비신현신(非身現身)이라 몸이 아닌데 몸을 나타냈다. 비신현신, 몸이 아니에요. 근데 몸을 나타냈듯이 사람 하나하나에는 둥그런 게 없어. 그런데 둥근 모양을 한 사람 한 사람이 원융하게 뭉쳐서 둥근 게 된 거예요. 매사가 다 그렇다. 이게 법성은 원융이다 이렇게 된 거예요. 이 법성을 깨달아서 보이는 대상으로부터 해탈해버렸어. 이걸 법계해탈이라 그래요. 원융을 깨달으면 법계라는 게 생긴 게 아니에요. 이걸 무생이라고 그러고. 아 어렵다, 이거. 원융무생. 없을 무, 날 생잔데, 난 건 전부 일어난 거거든요. 생기 연기. 인연으로 일어난 거, 생겨서 일어난 거 이런 건데, 그 법성원융을 보면 하나도 일어난 게 없고 하나도 생긴 게 없다. 이게 무생성기라 그래요. 법성은 진실상인데 진실상이 그냥 일어난 거다. 성기, 법성이 일어났을 때 법성성기라고 하거든요. 뭔 소린지 참 이게 뭔 소린지 진짜 맥빠진다. 이거. 법성성기다. 그러면 법성은 물, 물이다. 물. 그럼 거기에 그림자가 탁 생겼다 그러면, 그 물이 일어난 거지 하나도 일어난 게 없다. 그냥 물뿐이지, 그 안에 비춰진 달은 없다 이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원융을 이걸 발견해 내는데 엄청난 그 깨달음이 있었어요. 원융. 처음에는 몰랐는데 화엄경을 보니까 화엄경 초지에 육상원융(六相圓融)이라는 게 나와가지고, 마지막에 무너질 괴자, 괴상(壞相)이 있는데 이 괴상이라는 건 뭘 보더라도 각자 자리에 있더라 이거예요. 각자 자리에. 예를 들면 집을 하나 짓는데, 주춧돌이나 뭐 기둥이나 서까래나 지붕이나 마룻장이나 다 각자 자리에 있어. 그런데 이놈들이 전부 이제 제자리에 있으면서 하나의 집을 만들어내더라 이거죠. 여기서 보고 탁 깨달은 거예요. 여기서 보고. 그래서 어떻게 깨달았냐. 조그마한 티끌이 전 우주를 만들어낸다. 우주 티끌이 제자리를 지키면서 우주가 됐다. 그러니까 동쪽에서 동쪽을 떠나지 않고 모든 걸 다 만들고, 서쪽에서 서쪽을 떠나지 않고 모든 걸 다 만든다. 그래가지고 이걸 이 원융을 설명하기가 너무 어려우니까, 사람 몸을 또 비유를 해서 설명을 하거든요. 사람 몸을 가만히 보니까 하나하나가 전부 제 자리를 지키고 있어요. 팔도 제자리에 있고, 손도 제자리에 있고, 얼굴도 제자리에 있는데, 몸이 없어, 거기는. 발뿐이야, 손뿐이에요. 몸이 없고. 그런데 발이 발 위치를 떠나지 않고 온몸을 만들어요. 온몸이 돼버려. 이걸 원융이라고 그러거든. 또 얼굴이 얼굴을 떠나지 않고 몸을 이루어. 이걸 이제 원융이다. 그러니까 법의 진실상은 이 원융으로 된 거다. 원융으로 됐기 때문에 발은 발뿐인데 몸이 나왔고, 이러니까 무생소생이라는 거예요. 남이 없이 난 바라는 거예요. 아따 어렵네. 이거 이거. 무생소생, 생긴 것이 없이 생긴 바다. 생긴 게 없어요. 손가락 하나뿐인데 이 손가락이 다른 거와 원융하게 조화를 이루어서 몸이 나왔으니까 생긴 바 없이 생긴 바다. 무생소생. 없을 무, 날 생, 바 소, 장소 소, 날 생. 남이 없이 난 바다. 이러니까 이 무생법을 아는 게 무생삼매인데 이 무생삼매에 딱 들고 나면 이 몸이 해인수월이에요. 바다에 비친 그림자, 물속의 달이다. 해인수월. 그래서 해인수월이니까 보이기는 보이되 전혀 생긴 게 아니기 때문에, 이 몸을 위해서 얽매일 필요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이걸 불가사의 해탈 경계이래요. 생각할 수 없는 해탈의 세계다. 무생삼매, 불가사의 해탈 경계, 이런 걸 깨닫고, 이런 걸 가르치는 게 불교예요. 무생삼매에 든다. 우리가 지금 낳는데, 움직이는데 이 몸을 가만히 관찰을 하니까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몸이 없고 뭐만 있냐. 지수화풍만 있더라. 흙과 물과 불과 바람과 이런 것만 있더라. 그래서 바람은 바람대로 있고, 흙은 흙대로 있는데, 이것이 원융하게 제자리를 움직이지 않고 하나의 몸을 이루었다. 그러니까 몸이 보이지만 이건 남이 없이 난 거예요. 무생소생이요. 그래서 이 무생삼매에 딱 든단 말이에요. 그러면 나만 무생소생이냐. 일체법이 전부 남이 없이 난 것이다. 무생소생이다. 그러니까 삼천 대천세계가 삼천대천세계가 아니고 전부 수월해인이다. 물속의 달이고 바다의 그림자다. 이래 해놓으니 이게 해인삼매란 말이죠. 그래서 해인삼매에 떡 들면 시간도 없고, 일체 법이 일체 법이 아니고, 오직 그걸 보고 듣고 관찰하는 지혜만 있는 거다. 그래서 여기서 일체유심조라는 거예요. 여기서. 일체는 마음으로 만든 거다. 그 마음에 비친 그림자다 이 소리예요. 법법은 원융이고 법법은 무생이다. 무생을 설명한 게 원융이에요. 원융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생겨도 생긴 게 없다 그거죠. 그러니까 이게 하나인데 하나라고 하는 것은 둘이 없으면 하나가 있을 수 없어요. 둘을 전제로 한 하나란 말이에요. 또 하나가 없으면 둘이 안 돼요. 이렇게 하나는 둘로, 둘은 하나로, 그렇지만 하나는 하나 자리에서, 둘은 둘 자리에서, 수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수가 아무리 나와도 하나뿐이여. 하나 없으면 무량수가 될 수가 없어요. 이래서 어쩌자는 건데 이래서. 이래서 어쩌자는 거예요. 어쩌자는 게 뭐냐 하면, 우리 몸이 수월상이니까 물속에 비친 달의 모습이니까 근심 걱정할 거 없다는 거죠. 그게 해탈 경계라는 거죠. 몸이 물속에 비친 달의 모습인 줄을 환히 보고, 근심 걱정에서 훨훨 벗어나서 해탈 경계에서 놀아라 이 소리예요. 전부 우리가 몸에 매여서 근심하거든요. 근데도 이 몸은 우리가 걱정한다고 오래 머물러주질 않아요. 결국 보면 이제 화장막에 갈 몸을 하나 붙들고, 온갖 근심 걱정 다 하는 거예요. 이런 참,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법성은 원융하다. 두 모양은 없다. 원융치 않은 건 없다. 이 소리예요. 원융 밖에 없다. 두 모양 둘은 없다. 다른 건 없다 이 소리거든요. 둘은 다른 건데 둘은 없다. 이걸 다 깨치고 나니 그 둘이 없는 것을 보는 지혜뿐이다 이 말이야. 그걸 해인삼매라 그래요. 근데 이 지혜는 무시무종이여. 생긴 시작이 없고 끝나는 끝이 없어요. 끝도 시작도 없어. 언제나 그냥 해인삼매, 바다에 그림자가 비치는 그 물과 같은 것을 보는 거예요. 근데 보는 것도 해인이 지금 본다 시작하고 보고, 지금 안 본다 이렇게 끝내고 보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물이 항상 맑으면 그냥 보고 그냥 안 보는 거예요. 이걸 무시무종이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제불 삼매는 시작과 끝이 없어요. 부처님의 삼매는 죽비 딱 딱 치고 시작하고 들어가고, 또 죽비 딱 딱 치고 끝하고 마치고 그게 아니라, 바닷물에 달빛이 비칠 때 그냥 시작도 없이 그냥 비치고, 바닷물에 달빛이 사라질 때 사라짐이 없이 그냥 사라져요. 이게 불가사의 해탈 경계예요. 일부러 해탈하려고 와서 해탈하는 게 아니라 그냥 불가사의, 생각할 수 없는 해탈의 경계다 이 말이거든요. 法性者 無性法性 圓融法性 無住法性 不動法性也법성자 무성법성 원융법성 부주법성 부동법성야圓融者 竪窮橫遍 無處不遍 日圓融也원융자 수궁횡변 무처불변 일원융야芥納須彌 毛吞大海(維摩經 不思議品)개납수미 모탄대해(유마경 부사의품) 그래서 이건 전부 화엄경의 세계를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화엄경에서는 원융이라는 것을 수궁횡변(竪窮橫遍)이라, 원이라는 건, 둥글다라는 건 뭘 말하느냐. 수는 세울 수자인데, ·궁은 다 할 궁자. 시간적으로 과거·현재·미래를 다 관통해서, 과거·현재·미래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는 걸 원이라고 그래요. 둥글 원자. 또 융이라고 하는 것은 무처불변이라, 어느 곳에든지 없는 게 없는 걸 융이라 그래요. 어느 곳에든지 없는 게 없는 거. 산에 올라가면 되게 재밌는데, 그 나무나무마다 한결같이 잎새가 피는데 그거 신기하더라고. 저쪽 나무에도 잎새가 피고, 이쪽 나무에도 잎새가 피고 가는 데마다 그 나무에 잎새가 그렇게 펴요. 이게 누가 시켜서 이렇게 피나. 저쪽에 피고 이쪽에 피고 그냥 안 피는 나무가 없어. 그게 융이거든요. 끊임이 없이 두루하다. 그런데 그거를 유마경 부사의품이 있는데 그런 데서는 이렇게 설명했어요. 큰 것도 작은 것도 없이 다 원융하다. 개납수미(芥納須彌)라. 겨자씨 개자가 있는데요. 겨자씨 그 들깨 모양보다도 더 작을걸요. 겨자씨 모양이. 계자 계자 계자씨. 근데 이 개자씨가 수미산을 다 거둬들인다 이거지. 겨자씨가 수미산을 거둬들여. 이걸 개납수미라 그래요. 개납수미. 겨자씨 개자, 거둬들일 납자, 출납이라는 납자, 수미, 수미산 또 모탄대해(毛吞大海), 털이 하나 있는데, 이 털이 탄, 삼킬 탄, 큰 대 바다 해. 요 털 끝에서 큰 바다를 다 삼킨다. 이게 이제 법이에요. 근데 이 게송이 통도사 극락암 그 법당 주련에 있었는데, 나 처음에 이거 보고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거든요. 근데 이게 딴 게 아니고 부처님이 깨달으신 법성원융 이치를 유마경 부사의품에서 말했는데 그걸 이렇게 게송으로 달았더라고. 그러니까 수미산도 겨자씨도 전부 법성원융으로 이게 생긴 거예요. 수미산이 없으면 겨자씨도 없고, 겨자씨 없으면 수미산 없고, 서로서로 제자리를 지키면서 수미산도 되고 겨자씨도 되는 거예요. 털끝과 바다. 털끝이 없으면 바다도 없고, 바다가 털끝을 삼키고 또 털끝이 바다를 삼키고. 그래서 이건 전부 수월해인이다. 물속에 비친 달이다 이런 거예요. 그래서 법에 하나하나에는 법이 없다. 그게 뭔 말이냐. 기둥에는 집이 없다. 기둥 하나에 집이 없다. 또 서까래 하나에는 집이 없다. 마룻장 하나에는 집이 없다.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무법이라 그래요. 법이 없다고. 그럼 어째서 있느냐, 원융으로 있다. 이게 전부. 끝없이 서로 합쳐져서 있는 거다. 끝없이 합쳐져서 있으니까 있어도 생긴 게 아니다. 물속의 달과 같다. 이렇게 아무리 설명해봐도 돌아서면 그만이여. 그런데 안 할 수도 없어. 이렇게 오랫동안 불교를 믿고 기도를 하고 복을 짓고 정진을 했는데 도대체 이게 부처님은 뭘 깨달았을까. 필경성불이라, 우리가 마침내는 성불을 해야 되거든, 해탈해야 된단 말이에요. 불교는 믿으면서, 해탈을 못하고 믿으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了知一切法 自性無所有요지일체법 자성무소유如是解法性 卽見盧舍那(華嚴經,須彌頂上偈讚品)여시해법성 즉견노사나(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 그래서 법에 법이 없다. 그걸 화엄경에서 요지일체법(了知一切法) 이런 게송이 있어요. 요지, 알 료자, 수료한다는 료자고, 알 지자고, 일체법이다.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 자성이 있는 바가 없다. 내가 절에 와서 어떤 선배 스님이 이것 좀 새겨보라고 하더라고. 이게 잘 안 들어와. 그래서 내가 겨우 새긴 게 <일체법을 알면 자성은 있는 바가 없다> 이렇게 새겼거든요. 요지일체법, 요지는 안다 이 소리 아니에요. 일체법 자성무소유 자성이 일체법의 그 자체 실상, 일체법의 자체 실상이 있는 바가 없다. 그래서 그렇게 새겼어요. 일체법을 알면 자성이 있는 바가 없다. 여시해법성(如是解法性)하면, 이것이 해법성 하면, 이와 같이 법성을 알면, 즉견노사나(卽見盧舍那)라, 바로 노사나불을 본다. 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에 있는 게송인데,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배워보니 그게 아니고, <일체의 법이 자성이 있는 바가 없음을 알아라.> 이게 요지는 안다.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일체법이 자성이 있는 바가 없다. 몸에는 몸이 없고 돌에는 돌이 없고 하늘에는 하늘이 없고 자성이 있는 바가 없어. 자체 진실상이 있는 바가 없어. 화나는 데는 화가 없어요. 화나는 곳을 가만히 보면 어딘가 사라져버렸어. 화가. 또 좋아하는 마음도 자성이 없어, 좋아하는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놈도 어딘가 사라져 버렸어요. 이 모양이에요. 그냥 뜬구름처럼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인생은 뜬구름이다. 진실상은 없고 그냥 왔다 갔다만 하는 거예요. 이게 자성무소유거든요. 자성이 있는 바가 없다. 이와 같이 법성을 알면, 법의 진실상을 알면 즉견노사나라. 노사나는 이게 이제 광대지혜인데 바로 광대한 지혜의 부처님을 볼 것이다 이랬어요. 나중에는 법은 없고 노사나만 있다는 얘기여. 노사나만 있다는 얘기거든요. 그러니까 법은 없고 지혜뿐이여. 무법유지, 법은 없고 지혜만 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냐. 생각하는 대로 보이는 거죠. 없는 걸 딱 생각하면 다 없어. 있는 걸 딱 생각하면 다 있어. 이게 이제 해인삼매의 경지거든요. 그 물속에 모양을 딱 보면 모양으로 보면 모양이에요. 물로 보면 물이에요. 그냥. 근데 그걸 모르면 그 물속에 보인 모양을 구하려고 물속으로 들어가서 찾다 보면 찾지는 못하고 몸만 빠져 죽는 거지. 그게 뭐와 같으냐 하면 세상 거 구하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구하는 건 못 구하고 나중에는 걱정 근심뿐이더라. 진짜 갈수록 어렵다. 이거. 보통 아니네. 一念普觀無量劫 無去無來亦無住일념보관무량겁 무거무래역무주如是了知三世事 超諸方便成十力(華嚴經,光明覺品)여시요지삼세가 초제방편성십력(화엄경,광명각품) 그리고 또 화엄경 광명각품이 있는데, 광명각품 거기에는 일념보관무량겁(一念普觀無量劫)하면 1찰나에 무량겁을 볼 수 있어요. 한순간에. 무량억겁을 딱 볼 수 있는 게 지혜란 말이에요. 무거무래역무주라(無去無來亦無住), 이 법이라는 게 가는 것도 없어. 법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법이라는 게 오는 것도 없어. 법이라는 게 머무는 것도 없어. 그러니까 여시요지삼세사(如是了知三世事)하면, 이와 같이 과거· 현재· 미래 3세를 환히 알면, -이게 지혜로서 아는 거죠.- 알면 초제방편성십력(超諸方便成十力)이라. 모든 방편의 세속된 단계를 뛰어넘어서, 초월해서 여래만이 가질 수 있는 정각 십력, 10가지 힘이 있는데 그것도 역시 지혜의 힘이죠. 여래십력, 여래만이 가질 수 있는 여래 지혜의 힘을 이룬다. 그러니까 이 가르침이 법은 없다. 지혜만 있다. 그래서 지혜로 만법에 자제하고, 지혜로 만법에 안락하니까 이것을 불가사의 해탈 경계라고 한다. 불가사의 해탈 경계, 거기에 극락세계도 있고 거기에 온갖 복된 세계도 있고, 거기에 안락세계도 있고 이런 게 전부 무법유지에서 오는 거예요. 법은 없고 지혜만 있는 데서 오는 거예요. 참 기가 막히네. 기가 막혀요. 기가 막혀. 無住法性 圓融無二 무주법성 원융무이無住常住 解脫境界무주상주 해탈경계 그러면 그거를 이제 뭐라고 하냐 무주상주(無住常住)요. 머묾이 없이 항상 머무는 거. 무주, 없을 무 머물 주. 그게 이제 물속의 달이 머묾이 없이 머문다 이 말이죠. 무주상주 원융무이(圓融無二). 원융해서 다른 것이 없어. 물이 없으면 달도 안 보이고 또 달이 없으면 또 물속에 물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거 아니에요. 그림자가 없기때문에. 원융해서 둘이 없다. 그러니까 무주법성 무주법성(無住法性)이 원융무이다. 무주, 머묾이 없는 법성이 원융무이하다. 원융해서 다른 것이 없다. 무주법성 원융무의. 머묾이 없는 법의 진실상이 원융해서 다름이 없으니, 무주 상주로, 머묾이 없이 항상 머무는 것으로 해탈 경계다. 그러니까 일체 이 죽고 사는 게 전부 해인수월인데 바다의 그림자고, 물속의 달인데 이게 그냥 무주상주인 거예요. 머묾이 없이 항상 머무는 거예요. 해인수월이 어디서 와도 오는 게 아니고 가도 가는 게 아니고. 물속에 오는 달을 볼 때도 보는 지혜뿐이고. 왜 그러냐 하면 물속에 달이 보이긴 하는데 물이 달로 쫓아간 것도 아니고, 달이 물에 빠진 것도 아니고, 물은 물대로 있고 달은 달대로 있는데 물속에 보인단 말이에요. 이걸 무생소생이라 그래요. 남이 없이 난 바다. 참 기가 막힌다. 이게. 기가 막힌 게 보통 기가 막힌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무주, 머묾이 없이 항상 머무니까 그게 해탈 경계다. 물속의 달이 머물긴 머물러. 근데 머묾이 없어요. 무주상주요. 그러니까 일체만법이 다 해탈 경계다 이거죠. 우리가 이게 무주상주 법성원융 해탈 속에 있으면서 온갖 근심 걱정에 꿈을 꾸고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깜깜하게 꿈꾸는 마음에 눈을 딱 뜨라고 이렇게 4월 초파일 날은 온갖 지혜 광명의 등불을 비춰서, 중생의 어리석은 마음을 환히 비춰서 다 불가사의 해탈 경계를 이루어라 이거거든요. 심정토정이라, 마음이 깨끗하면 국토가 다 깨끗하다. 마음 심, 깨끗할 정, 또 국토 토 깨끗할 정, 심정토정, 마음이 깨끗하면 국토가 깨끗하다. 그래서 등불을 계속 밝히는 거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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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4월9일 음력 3월 초하루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4-04-09
- 義相祖師法性偈(의상조사 법성게) 이야기 ① -義相스님의 生沒年代와 華嚴學風(의상스님의 생몰연대와 화엄학풍) 안녕하십니까? 갑진년 3월 초하루 진관사 법문입니다. 초하루 법문에 <의상조사 법성게(義相祖師法性偈)> 법문을 하기로 했습니다. 의상조사 법송게 법문. <의상조사 법성게 이야기> 이런 내용이거든요. 법성게가 뭐냐? 한국불교는 그 주류가 화엄 신앙이에요. 한국불교의 주류가 화엄신앙인데, 화엄신앙의 대중 의례가 첫째는 약찬게(略纂偈), 둘째는 법성게 그렇거든요. 약찬게는 화엄경의 성립 구조, 화엄경이 어떻게 어떻게 성립이 됐다, 품이 몇 품이고, 뭐 이렇게 나오는 보살, 신장, 선지식 이름이 누구 누구다, 이렇게 그 명목, 차례, 구성, 이런 걸 쭉 기술하고 그걸 외우는 게 약찬게 독송이거든요. 법성게는 화엄경에서 뭘 말하고 있느냐, 경전이나 그 품 수, 차례는 전혀 말이 없고요. 화엄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그 본뜻, 그것만 설명하는 게 의상조사 법성게에요. 그러면 의상조사 법성게라는 게 뭐냐 하면, 신라시대에 의상스님께서 화엄경을 공부를 하시고, 그 법성게를 지으신 거예요. 지었는데, 그것이 다른 내용이 아니라 <화엄경 내용을 그대로 요약해서 요지로 제시하고 계신다> 이런 뜻이거든요. 그래서 화엄경은 법성을 말하고 있는데, 법이라는 것은 만법의 본성, 일체만법의 본성, 자성의 법성인데 그것을 게송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법성게거든요. 그런 내용이고. 生沒年代(생몰연대)湘武德八年生 丱歲出家 至龍朔元年辛酉入唐 就學於智儼상무덕팔년생 관세출가 지룡삭원년신유입당 취학어지엄總章元年(668) 儼遷化 咸亨二年(671) 湘來還新羅총장원년(668) 엄천화 함형이년(671) 상래환신라長安二年壬寅示滅 年七十八(三國遺事卷三, 前後所將舍利條)장안이년임인시멸 연칠십팔(삼국유사권삼, 전후소장사찰이조) 의상스님은 眞平王(진평왕)47년(625년)에 示生(시생)했다. 어린 나이에 출가했다. 文武王一年(문무왕1년)(661,37세)에 입당하여 智儼祖師(지엄조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668년에 지엄조사가 입적한 뒤 671년(47세)에 의상스님은 신라로 돌아왔다. 의상스님은 聖德王一年(성덕왕1년)(702,78세)에 示滅(시멸)하였다. 법성게는 누가 지었느냐. 의상 스님께서 지으셨는데, 의상 스님이 언제 분인가. 신라 시대에 진평왕이라고 있는데요. 선덕왕, 그 이전에 진평왕이고, 진흥왕보다는 좀 긴데, 북한산 비봉에 올라가면 비가 있는데요. 이건 진흥왕이 세운 거예요. 진흥왕 다음에 이제 진평왕인데, 그 진평왕 47년에 태어났어요. 그때가 47년에 태어났는데, 서기로는 625년. 그래서 횟수로는 금년이 딱 1,400년이에요. 이제 내년 되면 1,400주년인데, 태어난 지가, 그래서 1,400주년을 맞이해서 학술 모임이라든지 기념 모임을 어떻게 준비한다는 소리도 듣고 있거든요. 그래가지고 625년에 태어나서 딱 보니, 이 성 씨가 박씨인지 김씨인지 잘 몰라요. 어느 기록에는 박씨라고 하고, 어느 기록에는 김씨라고 했어요. 박씨, 김씨가 신라의 왕족이거든요. 그건 뭐 크게 알 것도 없고. 근데 어린 나이에 출가를 했다. 어린 나이라 그러면 쌍머리 따는 나이, 옛날에는 쌍머리로 땄다고 그래요. 그러다가 이제 나이가 들면 총각이라고, 외 머리를 땄고, 총각은 아니고 관세(丱歲)라는 건 쌍머리 관자가 있는데, 쌍머리 땋을 나이, 그러니까 10세에서 15세 이전의 나이를 관세, 쌍머리하고 다니는 나이, 이렇게 설명을 하거든요. 어린 나이에 출가를 했어요. 그래가지고 출가해서 뭘 공부했는지, 어디서 배웠는지 전혀 몰라요. 기록이 전혀 없어, 지금 기록으로는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나이가 37세가 됐어요. 그때가 이제 문무왕 때인데, 문무왕 1년, 문무왕이라고 그러면 누구냐 하면, 저기 경주 감포에 가면 수중에 능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 왕이 문무왕이에요. 태종 무열왕의 아들이거든. 그러니까 문무왕 1년에, 37살 나이에, 중국에 들어갔어요. 중국에 왜 갔냐. 화엄경 공부하러 가신 거예요. 그래서 이제 입당(入唐)을 해서, 그 당시 지엄조사(智儼祖師)라고, 화엄종 지엄조사라고 대단한 스승이 계셨는데, 거기에 가서 가르침을 받았어요. 37살에 가서 7년 있었는데, 44살 때쯤, 44살에 이 법성게를 지으셨어요. 근데 그 해에 또 지엄선사가 돌아가시는 해에요. 그래서 지을 때부터 지엄조사의 지도를 받고, 여러 가지 평가를 듣고, 격려를 받고 해서, 이거는 지엄화상의 가르침과 또 의상 스님의 학습 능력이 합해져서 이루어진 거라, 이루 말할 수 없이 감회가 깊은 그런 저술이거든요. 지엄화상이 668년에 이제 돌아가시고, 3년 있다가 671년 의상 스님의 나이 마흔일곱에 신라로 돌아오셨어요. 신라로 돌아오셔서 31년을 더 사셨어요. 47에 신라로 돌아오셔서 78살에 입적을 하시거든요. 이제 오시자마자 역시 여러 곳에 다니면서 화엄경을 가르치시는 일에 열중하셨거든요. 그래서 그 근본 도량이 영주 부석사, 그곳이 의상 스님 화엄 근본도량이고, 그 외에는 화엄 도량이 전국 곳곳에 건설이 돼가지고, 의상 스님 화엄십찰이라고 얘기를 해요. 화엄십찰. 그래서 화엄십찰과 선문구산, 천태육산, 뭐 이렇게 정리를 해서 한국불교사를 기록하는 경우가 있어요. 화엄십찰, 선문구산, 천태종의 천태육산. 지금 생각해 보면 성덕왕 1년 702년에 78세에 돌아가셨는데, 그때는 이렇게 오래 살 때가 아니거든요. 한 50대면 대략 딱 가는데, 엄청나게 오래 산 거예요. 78에. 생몰연대는 이렇고요. 의상스님이 화엄을 공부하시고 화엄으로 화엄삼매에 드시고 그 화엄으로 제자들을 육성하시고 인도하셨는데, 의상스님은 이 화엄 학자로서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독특한 분이에요. 왜 독특하냐. 일반 화엄학의 대가가 중국에 세 분이 계신데, 지엄조사, 법장조사, 청량조사 세 분인데, 이분이 다 화엄을 어떻게 공부했느냐면 화엄경에 대한 해석을 해요. 화엄경. 그래서 경소예요. 경소. 그래가지고 오늘날 화엄경에서 뭘 가르쳤나, 이걸 알려면 이 삼소를 보지 않으면 안 돼요. 지엄소, 법장소, 청량소. 이걸 화엄삼소라고 그러는데, 그걸 봐야 되는 이유가 화엄경에 대해서 해석을 하고 화엄경에 대해서 설명을 했기 때문이에요. 華嚴學風(화엄학풍)① 의상스님의 著述特性(저술특성)“一乘法界圖 合詩一印 依華嚴經 及十地論 表圓教宗要 總 “일승법계도 합시일인 의화엄경 급십지론 표원교종요 총章元年 七月十五日記”(佛教著述 : 釋經書 宗要書)장원년 칠월십오일기”(불교저술 : 석경서 종요서)合詩大旨 大經大教 一乘法界 圓融圓滿합시대지 대경대교 일승법계 원융원만 無障無礙 自位不動 行業滿成 무장무애 자위부동 행업만성 근데 의상스님은 화엄경 해석은 한 마디도 없어요. 참 희한해요. 그러면 뭘 했냐. 이 지금 우리가 독송하는 의상조사법성게인데, 이거는 의상조사 법성게라고 하는 것은 이건 독송 명칭이고, 저술 명칭은 일승법계도 합시일인(一乘法界圖 合詩一印) 이거예요. 이거 어려운데, 일승법계, 그림 도자, 합할 합자, 시라는 시자, 합시, 한 일자, 도장 인자, 일인. 일승법계도 합시일인. 이것이 이 저술 명칭이에요. 이런 명칭으로서 이제 짓는 이유가 뭐냐. 제일 끝부분에 밝혔는데, 의화음경 급십지론(依華嚴經 及十地論)하여, 화엄경이 있고 화엄경을 해석한 세친보살의 십지론이 있는데, 의상스님은 화엄경과 화엄경 십지론에 의지하고 근거해서, 표원교종요(表圓教宗要)라, 원교라고 하는 것은 둥글 원자, 가르칠 교자, 원교인데, 화엄경의 가르침을 원교라고 해요. 원교. 원만 무궁한 가르침이다 이 말이에요. 원만하고 끝이 없다. 원교라고 그러는데, 원교에 종요를 표한다. 종요는 종갓집이라는 종자하고 중요하다는 요 자, 종요인데, 그 종은 뿌리를 말하는 거예요. 뿌리. 요는 줄기를 말하는 거예요. 줄기. 그래서 이제 나무를 비유로 말하면 6가지 구분이 있는데, 뿌리, 그걸 뿌리 근자 근, 줄기, 줄기 경자, 경, 근경, 지엽, 가지 지, 가지, 잎새, 꽃 화, 열매 과자, 과. 그래서 나무는 근경지엽화과(根莖枝葉華果) 6가지로 구분이 된다. 그런데 종요라고 하면 그 뿌리하고 줄기만 이야기한다 이거예요. 뿌리하고 줄기. 이게 종요예요. 지엽이라든지 이런 거는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 글을 지을 때 종요서가 있고, 석경서가 있는데, 석경이라는 건 해석할 석자하고 경전이라는 경자, 경전을 처음부터 쭉 해석하는 게 이게 석경사에요. 근데 종요라는 건 경전을 따라서 해석을 안 해요. 경전에서 이야기하는 골수, 골자, 그것만 딱 정리해내는 걸 이걸 종요라고 그래요. 근데 이 법성게 저술은 화엄경 종요다, 화엄경 해석이 아니다 이거예요. 이렇게 전술한 거는 의상스님밖에 없어요. 다 경전을 해석했어요. 종요를 제시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경전 공부하다 보면, 두 가지 대표적인 거 있는데, 석경서와 종요서 대표적인 게 석경, 경전을 해석한 대표적인 게 화엄경 십지론이고, 종요만 드러낸 대표적인 게 대승기신론이라 그래요. 대승기신론은 여러 경전을 전부 종합해서 그 골수만 드러낸 게 대승기신론이라, 성론, 종론 뭐 이러거든요. 근데 우리나라에는 이 종요를 좋아해요. 원효성사도 저술한 거 보면 종요라는 제목이 많아요. 한국 사람들은 특이해요. 요점만 챙기지, 나머지는 그냥 싫어해요. 그래서 사람도 말 많은 거 싫어해요. 결론, 핵심만 딱 드러내는 거 좋아하거든요. 제일 인기 없는 남자가 말 많은 남자예요. 말 많은 사람. 그런 사람 인기 하나도 없어요. 연애도 못해요. 만났다 금방 헤어져. 그래서 그 핵심, 요점, 그걸 말로 하는 게 아니라 또 행동으로 탁 할 때 감동을 줘요. 설명이 길면 지루해. 핵심 요점을 파악해서 행동으로 표현할 때, 굉장히 감동을 주는데 의상스님이 바로 그런 분이에요. 저술도 종요로 저술을 했지, 경전 해석으로 저술을 안 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경전을 설명하지 않으세요. 그럼 뭐냐? 경전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직접 보게 하고, 직접 만지게 하고, 직접 간직하게 하는 건데, 그걸 관법이라 그래요. 화엄경을 보고 니가 스스로 봐라. 이게 관법이거든. 보는 방법. 화엄경에서 뭔가 말할 거 아니에요,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지금 눈으로 보는 거 하고 화엄경에서 말하는 내용하고 거리가 있어, 틀려. 그럼 화엄경에서 말하는 내용을 내가 보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관을 하는 거예요. 딱 보는 거예요. 봐. 그래서 인간의 행위는 생사업이 있고 지혜업이 있는데, 생사, 나고 죽는 행위인데, 이 생사업이라는 건 뭐냐 하면 계속 구하는 거예요. 그래서 소유를 해요. 구하고 소유하고 구하고 소유하고. 구하다 죽어요. 이건 어린애서부터 나이 많아도 똑같아요. 어떤 분은 이야기하기를 자기가 나이가 80인데, 80에도 대중 앞에 나가면 떨린다고 하더라고. 기가 막히더라고. 나이 80에 뭘 구하길래 떨고 있냐. 근데 100살 때도 떨어요. 그냥 더 잘 보이려고 하는 욕심이 있고, 더 잘하려고 하는 욕심이 있어서, 그럼 잘 보이고 잘하려는 건 뭐냐. 좋은 거 구하려고. 이게 생사업이라고 그래요. 구하면 그게 영원한가. 없어져요. 또 구하고. 구하면 없어져요. 또 구하고. 구하다 죽는 거예요. 새는 날다가 죽고, 인간은 구하다 죽어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빈 가슴을 가지고 사는 거예요. 인간이라는 게. 근데 잘해줄 필요 없어요. 잘해주면 그거 받고, 금방 또 다른 걸 달라고 그래요. 근데 이것들은 잘 모르더라고. 내가 이만큼 해주면 좋아하겠지. 천만에. 받을 때만 좋아해요. 받고 나면 다른 거 또 달라고 그래요. 그게 인간이에요. 그러니까 인간 자체가 구하다 죽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럼 어떻게 되냐. 안 주면 원수 되니까 원수가 안 될 만큼만 줘야 돼요. 그리고 스스로 지혜의 업을 닦게 해야 되는 거에요. 생사업은 구하는 업인데, 지혜의 업은 깨우치는 업이에요. ‘인간이라는 게 이런 거로구나.’ 그걸 깨우쳐서 지혜로 만족하고, 지혜로 행복하고, 지혜로 평화로운 그런 훈련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그 막 구하는 감정을 조절할 수 있어요. 인간은 능력 있으면 행복할 줄 아는데 천만의 말씀이에요. 이 무지막지하게 구하는 감정 조절 못하면 그냥 멸망해요. 감정 조절 못해서 멸망한 사람이 대부분이에요. 대부분. 시어머니한테 대들었다가 평생 혼나고, 이런 거. 이런 거 많아요. 그래서 이 감정 조절 못해서 불행한 경우가 많지, 능력이 부족해서 불행한 경우가 얼마 없어요. 능력은 키우면 돼요. 참, 근데 우리나라 이 교육이 감정을 조절하는 교육은 별로 없어요. 능력 신장하는 교육이 대부분이에요. 능력 아무리 많으면 뭐해요? 한순간에 감정 조절 못해서 큰 사고 쳐가지고 평생 힘들게 사는데. 이런 얘기는 이제 법성게에 없고요. 공연한 소리 이렇게 해보는 거지. 그래가지고 이제 한국에 돌아오셨는데, 31년 동안을, 47세에 돌아오셔서 78세까지 이제 사셨단 말이에요. 그래서 계속 이 화엄경 지도를 하는데, 경을 가르친 게 아니라 화엄경에서 말하는 그 내용을 직접 보게 하는 관법을 지도했다. 그래서 의상 스님은 큰 저술이 없어요. 이 법성게 이거예요. 일승법계도 합시일인. 그런데 그 내용이 들어가기 전에 이 법계도 이 법성게가 무엇을 말하는 거냐. 이 화엄경을 대경대교(大經大教)라고 하거든요. 큰 대자, 경이라는 경자, 대경. 큰 경. 크단 말은 온전하게 다 설명하는 경. 또 큰 가르침. 이 대경 대교인데, 대경대교에서는 일승법계(一乘法界)를 말한다. 일승법계. 한 일자, 승용차라고 하는 탈 승자, 일승, 법의 세계. 그럼 일승이라는 게 뭐냐? 일승이라고 하는 거는 오신신상, 내 몸에 내 몸 모양이 있고, 법계신상, 온 우주의 모양이 있어요. 내 몸 모양과 우주 모양이 원융무이하다. 서로 통해서 둘이 없다, 이걸 가르치는 거예요. 오신신상 법계신상 원융무이. 근데 우리 범부는 내 몸이라는 건 만만하지. 이게 법계 몸이라는 거는 생각이 없어요. 이 우주의 몸이다, 이게. 이게 참 대단하지, 대단해. 너무 대단해서 목 좀 축이고 해야 되는데. 저 소리(핸드폰벨소리)도 법문이에요. 듣고 나면 저 소리와 듣는 내가 원융무이해요. 저 소리와 저 소리는 법계신이고, 듣는 나는 나의 오신상인데 둘이 없다. 이 몸이 나라는 것만 알기 때문에 그렇게 구해요. 이 몸이 온 천지 우주 법계의 몸이다. 이렇게 되면 오신상이 법계신상이 되는 거예요. 한번 만져봐라. 여기 법계 몸 너 잘 있냐, 여기. 법계 몸 너 잘 있냐, 우주 몸 너 잘 있냐, 이 몸은 우주의 몸이다. 이 몸은 온 세계 자연의 몸이다. 그 오신과 법계신이 원융해. 원융이라는 말은 서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이 우주 속에 내가 들어가고, 또 우주가 나한테 들어오고 그래서 둘이 없어요. 원융무이해요. 그리고 하나도 장애가 없어, 원융무애해요. 근데 이걸 어찌 알았냐? 화엄 삼매에 들어야 알아요, 이거를. 그게 화엄 삼매고. 화엄 삼매의 이제 기본을 또 해인삼매라고 하는데, 화엄 삼매는 그 원융무이를 공덕으로 무한히 펼쳐가는 게 화엄삼매고, 해인삼매는 원융무이를 물속에 든 달 보듯이 환하게 보는 게 그게 해인삼매예요. 해인이란 말은 바닷속에 그림자다 이 말인데, 그 인자가 그게 그림자처럼 선명하게 보인다 그런 도장 인잔데, 생각을 멈추고 지혜 바다로 환히 들어가면 내 몸과 온 우주가 똑같이 자기 지혜 광명 안에 다 들어있어요. 그걸 수월도량이라 그래요. 물속에 있는 달과 같은 세계, 도량이라는 건 세계라는 말인데 물속에 달과 같은 세계다. 그래서 이 몸을 느끼는 것도 내 지혜 광명이 있어서 이 몸을 느끼고요. 지혜광명 그 물 속에 이 몸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걸 보는 게 해인삼매거든요. 삼매에 들면 돼요, 이거. 생각으로는 안 돼요. 해인삼매에 딱 들면 이 몸도 지혜광명, 바닷 속에 밝고 밝은 그림자. 허공도 지혜광명, 바닷 속에 밝고 밝은 그림자. 온 우주가 지혜광명의 바닷속에 있다. 이걸 가르치는 거예요. 왜? 이제 부처님이 깨달아가지고 이걸 가르쳤기 때문에, 깨달은 게 바로 해인삼매거든요. 우리도 삼매에 들면 바로 봐요. 바로. 못 볼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삼매에 안 들지. 말만 듣고 그다음에 안 해요. 왜 안 하냐. 이 생각으로 사는 습관이 너무 깊이 들어서 그래요. 생각으로 구하려고 그러지, 해인삼매로 평화로우려고 안 해요. 지혜로 들어가면 평화가 있는데, 생각으로 구하다 보면 근심 걱정이 있어. 그러니까 이게 구하지 않으면요,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요. 모든 걱정은 구하는 데서 생겨. 거 희한하데. 희한한 게 뭐냐 요즘 젊은 사람들도 부모한테서 못 벗어나요. 근데 왜 그렇게 못 벗어났냐 그러니까, “부모 거슬리면요, 앞으로 돈 안 줘요.” 이래요. 돈 받으려고 부모 못 떠나. 이 참 기가 막혀요. 지 몸을 지가 살피지, 왜 부모한테 받아서 살라 그래. 이게 받으려고 하면 종 돼요. 노예가 되는 거예요. 안 받으려고 하면 그냥 주인 돼요. 그러니까 구하면 노예 되고, 안 구하면 주인 된다. 그 자식한테 뭐 바라지 말아요. 바라면 자식이 원수 돼요. 자식이 누가 주나, 지 살기 바쁘지. 부모 관심이 없어요. 그건 잘 모르더라고. 가끔 와가지고 뭐 잘 계셨느냐고 좋은 말 다 하니까 그게 자식의 본심인 줄 알아. 그게 속는 거예요. 자식 본심은 따로 있어요. 자식은 근본적으로 먹고 튀는 거예요. 나도 자식 해봤잖아요. 아니 부모한테서 뭐 받아먹을 건 많이 받아먹는데 그거 안 갚고 튀어버려. 그게 자식의 기본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해줄 거 다 해줬으면 그다음에 바라지 말아라. 안 바라면 자식으로부터 자유로워, 바라면 자식에게 끌려가, 끌려가면 노예죠. 이런 말은 또 화엄경에 없어요. 화엄경은 이 글자뿐이거든. 이런 말이 어디 있어. 그래서 일승법계. 화엄경을 보는 나와 화엄경에서 말하는 저 세계가 하나라는 거예요. 이게 일승이에요. 일승법계를 말한다. 그 일승법계가 원융원만(圓融圓滿)이라. 하나의 길이니까 원융하고 원만해. 원융원만이라는 건 뭔가. 작은 것이 큰 것을 다 거둬들이고요. 큰 것이 작은 것을 다 거둬들여서 큰 것이 작은 것 속에 있고, 작은 것이 큰 것 속에 있고, 이것 속에 저것이 있고 저것 속에 이것이 있어서 원융하고 다 무애해요. 그래서 무장무애해요. 장애가 하나도 없어. 대경대교 일승법계 원융원만 무장무애(大經大教 一乘法界 圓融圓滿 無障無礙)라. 그래서 어떡하자는 거냐. 각위부동하고, 각자 자기 지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이놈이 여기 딱 있어서 여기서 움직이지 않고, 이거를 다 여기 거둬들이는 도리가 있어요. 또 이것도 이걸 움직이지 않고 이것을 다 거둬들이는 도리가 있어요. 이게 자위부동(自位不動)이라, 각위부동. 자기 지위를 옮겨가지 않고 자위를 부동하고, 행업을 만성(行業滿成)이라, 하는 업은 원만히 다 이룬다. 이게 이제 화엄경의 뜻이고, 법성게의 뜻인데 핵심이 자위부동 행업만성. 자위 부동이라는 건 뭐냐. 이런 거예요. 이 집이 있는데 이 집은 주춧돌, 기둥, 서까래가 다 있어요. 근데 기둥이면 기둥, 주춧돌이면 주춧돌, 서까래 하면 서까래가 그대로 자기 자리에 다 지키고 자기 역할만 하는 거예요. 자기 역할만 하되 전체 집을 다 그것들이 완성시키고 있는 거예요. 기둥이 왔다 갔다 하는 거 아니에요. 기둥은 기둥대로 다 있는데 그게 집이 돼요, 전체가. 서까래는 그냥 서까래만 있는데 그게 다 집이 돼. 이게 자위부동하고 행업만성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가 모든 것 속에 있고 모든 것이 하나 속에 있다. 이게 이제 원융원만 무장무애인데, 이러니까 이걸 강의를 하는데 어떤 모임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그래요. 그래 하나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야. 그러면 너한테 그걸 증명해 보여라. 그래서 돈을 1원을 딱 가지고 이걸 만 원으로 바꿔달라 이랬어요. 이걸 1원을 내면서 이걸 만 원으로 바꿔달라. 그러니까 그 사람이 뭐라 그랬을까요? 대답을 잘 못했대. 공감이 안 됐대. 근데 이게 화엄경에서 일즉다 다즉일이라고 하는 건요. 하나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라고 하는 것은, 일원을 가지고 만원으로 바꾸는 게 아니에요. 일원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으면서 그 일원 속에 만원이 다 포함된 거예요. 그거를 어려운 말로 1원은 본수라고 하고, 만원은 만수라고 하는 거예요. 가득할 만자. 본수를 옮기지 않고 만수를 본수에서 다 포함하고 있는 거거든요. 또 만수를 만 원을 옮기지 않고 그 만 원 속에 1원이 다 있는 거예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1원 없는 만 원이 어디 있어요? 1만 원에서 1원 빼면 만 원 안 되거든요. 그런 거예요. 그래서 본수, 만수. 그래서 한 덩어리가 억이라고 할 때도 억은 만수 쓰고 그 일은 본수인데 억에서 1 빼봐요. 그게 얼만가. 99,999,999 그것밖에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만원 속에 일원이 있고 일원 속에 만원이 있어서 제자리를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 만원을 이루는 거예요. 이게 이제 행업을 원만하게 이룬다. 그러면 이것을 수행으로 보면, 행업이 수행인데 지금 이 중생의 몸을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 여래의 업을 다 이루는 거예요. 이게 화엄이에요. 이 몸 바꿔서 뭐 하는 게 아니에요? 법화경에는 바꿔서 한다는 말이 있어요. 변성 남자(變成男子)라는 말이 있는데, 용녀가, 용의 딸이 몸을 바꿔서 남자가 돼가지고 성불했다 이런 게 있어요. 근데 화엄경은 변성이 아니여. 그냥 자위를 부동하고, 자기 지위를 움직이지 않고, 행업만성이여, 하는 일을 다 이뤄요. 그래서 이 중생 몸 바꾸지 않고 그대로 성불하는 거예요. 그게 일즉다 다즉일이에요. 근데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 이게 저런 게 이해가 잘 안 된다 하는 건 이게 무명 망상이라 그래요. 그게 어리석은 망상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혜 광명으로 들어가면 되는데, 지혜 광명은 삼매에 드는 거예요. 딱 지혜광명에 들어가 보면 이 삼라만상 4대 육신이 참 지혜의 광명 속에 나타난 현상이에요. 이게 화엄삼매거든요. 근데 화엄삼매는 시작도 끝도 없어요. 보통 우리가 참선할 때 입선 출정이 있거든요, 입정 출정이 있는데, 시작할 때 죽비 딱 딱 치고, 정에 들어, 마칠 때 또 딱 딱 치고 마쳐. 이거는 이제 보통 일상 수행이고, 이 화엄삼매는 들어가는 게 없고 나오는 게 없어요. 항상 이 화엄삼매에요. 그리고 전생에 들었다가 금생이 나오고, 금생에 들었다가 내생이 나오고, 동방에서 입정했다가 서방에서 출정하고, 여자 몸으로 입정했다가 남자 몸으로 출정하고, 이런 거예요. 희한해요. 그냥 상식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해인삼매에 딱 들면 이게 뭐 하나도 이상한 게 아니고 그대로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이런 걸 가르치는 게 이게 화엄경이고 그 화엄경을 요약을 해서 제시하는 게 법성게거든요. 그리고 이제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그 관법을 이제 가르치는데, 관법은 뭐냐. 이 일승법계 여래십신. 여래간의 법계인데, 법계에는 한두 가지 몸이 아니라 무한한 놈이 다 있다. 이걸 열 십자, 몸 신자 십신이라 고 해요. 하나로 이루어진 법계, 여래에게는 열 가지 몸으로 나타난다. 일승법계 여래십신인데, 일승법계 여래십신을 보는 게 중요하다. 그것이 이제 삼매를 닦는 건데 삼매를 어떻게 닦아야 이거 일승법계 여래십신을 바로 볼 수가 있나. 그 말은 이게 내 몸인데 내 몸이 법계 몸이라고 하는 걸 보는 거예요. 법계의 몸을 법신이라고 하거든요. 내 몸을 오신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나 오자 몸 신자, 오신. 이게 내 몸인데, 이 내 몸이 법계 몸이라고 하는 걸 어떻게하면 볼 수 있습니까? 이거예요. 그래서 이 몸이 법신이다. 참 기가 막히네. 보통 일 아니에요. 근데 화엄삼매를 닦으면 이 몸이 법신이라는 걸 바로 눈앞에서 본다. 그건 뭐와 같으냐 하면, 꿈에 큰 바닷물 속에 빠졌어요. 그 바다가 끝이 없어. 근데 이 바다에서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나. 그 망망대해에서 한복판에 빠져가지고 허우적거릴 때 그것도 바닷물에서 나간다는 게 그게 불가능한 거잖아요. 근데 금방 나갈 방법이 있거든요. 어떻게 하면 되지요? 꿈 한 번 딱 깨면 그만이에요. 꿈 딱 깨면 그만이에요. 그게 삼매예요. 삼매라고 하는 건 중생의 망상의 꿈에서 깨는 거다. 그런데 화엄경이 그런 거예요. 일승법계 여래십신을 바로 보게 하는 거다 말이죠. ② 의상스님의 學業指導(학업지도) 相和尙 住大伯山 大蘆房時 爲眞定智通等說 行人欲見十佛 상화상 주대백산 대로방시 위진정지통등설 행인욕견십불 者 應先作眼目 通等問 云何是眼目耶 和尙曰 以華嚴經 爲 자 응선작안목 통등문 운하시안목야 화상왈 이화엄경 위 自眼目 所謂 文文句句 皆是十佛 자안목 소위 문문구구 개시십불 (叢髓錄卷下之二. 韓佛全6, 834中) (총수록권하지이. 한불전6, 834중) 그래서 이제 의상 스님이 그랬어요. 하루는 태백산 대로방(大伯山 大蘆房)이라고 하는 데가 있었는데, 큰 대자, 갈대 로자, 대로방에 머물 때 진정 지통(眞定智通), 진정 스님, 지통 스님이 의상 스님 제자, 아주 중요한 제자들이에요, 지통을 위해서 말씀을 하시기를, 행인이 욕견시불자(行人欲見十佛者)라, 여래십불, 여래십신 일승법계를 보고자 하는 자는 응선작안목(應先作眼目)하라, 응당히 먼저 눈을 갖추어라 이랬어요. 이 몸이 법신임을 볼 때, 또 십불 십신 일승법계를 보려고 하면 먼저 눈을 마련하라. 눈이 있어야 본다. 그러니까 지통 이런 분들이 묻기를 운하시 안목이냐(云何是眼目耶), 어떤 것이 이 십신을 보는 눈이냐. 그렇게 의상 선생님한테 물었죠. 화상왈(和尙曰), 의상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화엄경으로 위안목하라(以華嚴經 爲自眼目), 화엄경으로 눈을 삼아라 이랬어요. 화엄경이 이 몸이 법신임을 보는 눈이다, 화엄경의 눈으로 보면 다 보인다 이거죠. 그래서 이 경문을 본다는 것은 경문을 그냥 해석하고 외우고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경의 눈으로 우주 법계를 보는 거예요. 경의 눈으로 보는 거다. 이게 경안이에요. 근래에 와서 경안을 또 바로 해석한 적이 있는데, 본래 경안의 뜻은 경의 눈으로 우주법계 진실성을 보는 거다 그거거든요. 그냥 화엄경에서 가르치는 게 있잖아요. 그 가르침으로 눈을 삼아서 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이제 뭐냐 하면, 법성게에서는 일미진중에 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하고, 한 조그마한 티끌 속에 시방 세계는 다 포함하고 있다. 그 눈을 가지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 미진이 세계고, 세계가 미진이고 다 보일 거 아니에요. 무량원겁이 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이요, 일념즉시 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라, 무량아승지겁이 그냥 일찰라다 이 말이죠. 일찰라가 무량아승지겁이다. 그런 삼매에 딱 들어서 무량원급즉일념 삼매에 딱 들면 무량원급이 즉일념이라고 환히 보일 거 아니에요. 그러면 문문구구(文文句句)가 화엄경으로 눈을 삼아서 우주를 보면, 글자 글자 문구 문구가 다 십불세계 일승법계다. 그런 가르침을 주신 거예요.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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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 3월 29일 49재 법문
가섭스님 2024-03-29
마하반야바라밀 반갑습니다. 오늘 영가님의 49재를 맞이해서 하늘에서도 그간의 어머니가 주셨던 사랑만큼의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49재인 만큼 우선 어머니를 위해서 다 함께 마음을 모으는 시간을 좀 갖고자 합니다. 합장을 하시고요. 지금 게송은 어머니에게 전해주는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제행은 무상이요 생자는 필멸이라태어났다 죽는 것은 모든 생명 이치이니 임금으로 태어나서 온 천하를 호령해도결국에는 죽는 것을 영가님은 모르는가영가시여 어디에서 이 세상에 오셨다가 가신다니 가시는 곳 어디인 줄 아시는가 태어났다 죽는 것은 중생계의 흐름이라 이곳에서 가시면은 저세상에 태어나니 오는 듯이 가시옵고 가는 듯이 오신다면 이 육신의 마지막을 걱정할 것 없잖는가 일가친척 많이 있고 부귀영화 높았어도죽는 길엔 누구 하나 힘이 되지 못한다네 맺고 쌓은 모든 감정 가시는 길 짐 되오니 염불하는 인연으로 남김없이 놓으소서 49재를 맞이해서 우리 어머님이 극락왕생하셨으면 하는 그런 우리들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어머니에게 그 마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어디 갈 때 짐이 많으면 옮기기가 힘들 듯이, 돌아가신 분이 좋은 곳에 안락하게 가는 데 있어서 제일 힘든 건 아마도 내가 이생에 와서 인연 맺어서 또 같이 살았던 아들, 딸, 또 며느리, 손자, 또 손녀, 아마 가장 마음에 밟히는 것이 그런 친족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들을 좀 내려놓고 좀 가벼운 마음으로 더 좋은 세상에 인연 맺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49재를 봉행을 해서 그 마음을 기립니다. 어떻게 보면 49재는 돌아가신 어머니보다는 살아있는 우리들의 마음들을 좀 더 편안하고, 또 그리움들을 좀 더 아프고 또 힘들었던 기억보다는 어머니하고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기기 위해서 모십니다. <기억은 역사다>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이 어머니와 우리 가족들의 가정사의 한 부분일 겁니다. 오늘 이제 비가 자분자분 내리는데 이 빗물이 아마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만큼의 의미가 있을 것이고, 저는 이 그리움의 빗물이 또 어떻게 보면 그동안에 어머니하고 조금이라도 서운한 게 있다면, 조금 나쁜 게 있다면 그것을 씻어내는 그러한 빗물의 의미도 또 있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고, 또 봄의 빗물은 다른 때와 다르게 새로운 생명을 움트게 하고 성장하고 자라게 하는 그런 힘이 있거든요. 그래서 오늘 49재를 통해서 좀 더 성숙한 인연으로 나아가는 길이 될 것 같고, 또 어머니는 좀 더 좋은 세계로 갈 수 있는 그런 그립지만, 축복의 비가 세 번째 의미로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옛날에 부처님께서 아난존자하고 길을 가는데 갑자기 부처님께서 뼈 무덤을 보고 절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20년 넘게 부처님을 시봉했던 아난존자 입장에서는 깜짝 놀랐죠. 왜냐하면 부처님은 위대한 스승이고 또 사생의 자부(四生慈父)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근데 그런 분이 아주 남루한 그 초라한 뼈 무덤에 절을 하니까 아난이 웃습니다. “어떠한 연고로, 어떠한 인연으로 그 뼈 무덤에 그렇게 간절하게 절을 하십니까?”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묻습니다. “이 뼈가 남자 뼈이겠느냐, 여자 뼈이겠느냐?” 이렇게 물어봐요. 그러니까 이제 아난존자가 “어찌 뼈만 보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이 뼈 무덤은 여자의 뼈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잖아요. “어떻게 아느냐?” 그러니까 “남자의 뼈는 희고 무거울 것이며, 여자의 뼈는 검고도 가벼울 거다. 왜 그런고 하면은 아기를 한 번 낳을 때마다 여덟 섬 너 말의 피를 흘리고, 또 아기를 어느 정도 양육할 때까지 모든 본인의 영양분을 전달해 주기 때문에, 또 열 달 동안 품어서도 본인의 모든 걸 주기 때문에 그 뼈가 검고도 가볍다.” 그렇게 부처님께서 부모의 은혜가 얼마나 지중한지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업고,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업고, 무릎을 꿇고 그 수미산이 닳도록 오르락 내리락 해도 그 부모의 은혜는 다 갚을 수가 없다”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부모의 은혜 특히 어머니의 은혜는 우리가 이생에 올 수 있는 그런 인연을 주신 거기 때문에, 부모의 은혜는 참 지중하죠. 근데 살아있을 때는 알면서도, 모르는 건 아닌데, 알면서도 잘 되뇔 수 없는 그런 망각의 시간들을 우리가 보냅니다. 근데 그게 절실해지는 게 돌아가시고 한 달이 지고, 두 달이 지고, 49재가 지나고 나서, 100일째가 되면 그 그리움이라는 게 또 잘해줬던 것보다는 못 해줬던 게 생각이 나서 마음이 너무 아려오죠. 우리가 이제 옛날 어른들이 이렇게 3년 탈상한 것도, 이렇게 49재를 지내고 7번을 지냈잖아요, 그리고 100일째 한 번 더 지내고, 그리고 1년째 한 번 더 지내고, 그 3년째 한 번 더 지낸 게 이게 10번이에요. 시황에 해당되는 건데 그러면서 우리가 적어도 3년은 지나야 우리의 마음도 수순해지고 또 그때 우리 마음도 좀 더 정리된다. 아마 그런 의미에서 옛날에 어른들은 3년간 그렇게 모셨던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뭐 워낙 세월이 빠르다 보니까. 부처님께서 이제 80세에 입멸하셨잖아요. 저번 주 일요일이 이제 열반재일이었는데, 부처님께서 이제 입적하신, 적멸에 드신, 불교 용어로 말하면 반열반에 드신 그런 날이기도 합니다. 열반재일 그러죠. 부처님도 열반하실 때가 돼서 그 숲속에 머리를 북측에 두고 오른쪽으로 누워가지고 마지막 입멸의 순간을 맞이하십니다. 부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었냐면, 부처님 칭찬 한마디를 하고 가면, 아난다가 “왜 이렇게 허름한 숲속에 누워서, -그게 이제 구시나라의 사라쌍수 밑이죠.- 많은 대중이 모여 있는 데도 있고, 왕궁도 있고, 좋은 환경이 많은데, 왜 이 초라한 나무 두 그루 사이에서 입멸을 하십니까?” 이러니까, 부처님께서 “그런 말 하지 말아라. 나중에 이곳이 큰 성지가 될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하세요. 그게 현재 열반당에 있는 장소입니다. 구시나라의. 그러면서 말씀을 더 하시기를, “내가 왕궁에 들어가서 입멸을 하게 되면, 이생의 인연을 다하게 되면, 지위가 높은 사람은 나를 보러 올 수 있겠지만, 지위가 높지 않은 사람은 나를 보러 올 수가 없다.” 그러면서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지금 모든 사람에게 알려서 마지막 나에게 궁금한 것을 물으라 해라. 나를 마지막 보고 싶은 사람은 오도록 하라.”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소문이 나가지고, 이제 많은 사람들이 그 구시나국의 사라쌍수 근처에 모이게 되는 거죠. 그 제자들도 이제 많이 모여 있고, 그러니까 제자들은 얼마나 그 마음이, 본인이 그렇게 마음으로 영적으로, 이렇게 마음을 다해서 의지했던 귀했던 분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입장에서는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러고 있는데 이제 아난다가 여러 가지 질문을 합니다. “이제 부처님께서 돌아가시면 우리는 누구에게 공양을 해야 됩니까? 그동안에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서 공덕을 짓기도 하고, 흔연한 마음도 생기고, 또 법의 그런 환희심이라 법열이라 그러는데 그런 것도 느끼고 했는데, 이제는 부처님이 안 계시니 누구한테 해야 됩니까?” 우리도 그렇죠. 어머니 살아계실 때는 어머니하고 같이 외식을 해서 맛있는 걸 먹는다든가, 어머니하고 외출을 해가지고 고운 옷을 사드려서 아주 곱디 고운 그런 자태를 볼 때 마음이 기쁘죠. 근데 어머님이 이제 사대가 모두 흩어져서 안 계신단 말이에요. 그런 그때 부처님의 제자들도 그런 마음이었을 겁니다. “누구한테, 이제는 부처님 안 계시는데, 어떻게 공양을 짓고 어떻게 공덕을 지어야 됩니까?”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걱정하지 말아라. 나한테 공양을 하는 것과 똑같은 공덕이 있는 4가지가 있는데, 이 4가지를 잘 공양하면 마치 여래를 공양하는 것처럼 그 공덕이 수승하고 그 마음의 복이 충만할 거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아마도 지금 드릴 말씀, 이렇게 네 가지 공양을 그중에서 한 가지만이라도 잘 선택을 해서 내가 실천한다면, 그거야말로 어머니에게 공양 올리는, 그래서 그 공덕으로 어머니도 좋은 세상에 가고, 또 내가 이생의 인연이 되는 그 순간까지 장애 없이 막힘없이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가 뭐냐 그러면은,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는 겁니다. 우리는 이제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배를 굶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 도반이 있는데, -도반이 친구예요. 같이 스님 생활하는 친군데, 도반인데,- 이 친구는 매일 아침마다 새벽 4시면은 빵, 우유, 사과 이렇게 해가지고 종로 일대를 돌아요. 종로 일대를. 길거리에서 집을 잃어버리고, 끼니를 잘 못 채우는 분들을 새벽마다 찾아다녀요. 그 스님에게는 그 아침에 종로를 도는 게 새벽 예불이에요. 그리고 만나는 사람은 다 부처님처럼 대하는 거. 다 자고 있으니까 먹을 걸 놓고 합장을 탁 하고 물러나고. 그러는 도반이지만, 내가 아주 존경하는 도반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또 인연을 맺어서 내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더하고 하는 것. 그것이 이제 첫 번째로 끼니를 굶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공양하는 것, 그것은 어머니를 공양하는 것 같은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두 번째로는 아픈 사람에게 치료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부처님에게 공양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계에 아픈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의학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해도 병원은 항상 만원이잖아요. 그리고 작은 병, 큰 병으로 시름 하는 사람이 많아요. 인간이 이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병이 404가지나 된다고 그래요. 사대에서 한 대마다 101가지의 병이 있으니까 404가지, 404가지의 병이 있다, 그렇게 이제 얘기를 하는데, 얼마나 많은 아픈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가끔씩 가서 봉사도 하고 위로도 해주고 하는 것. 그것이 공양이고, 그것이 어머니에게 공양하는 것이고, 그리고 부처님에게 공양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제 공양이라고 하는 거는 평소에 그런 마음들을 지어야 되는 거예요. <마음을 짓다>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세상에는 이 짓다라고 하는 용어가 있는데 여기에는 집을 짓다, 여러 가지 옷을 짓다 그러죠. 여기는 마음이라고 하는 게 포함돼 있는 거예요. 마음 없이는 불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평소에 잘 짓는 것, 밥을 짓다 그러죠. 밥을 짓는 것도 마음이 빠져버리면 설어버려요. 그래서 마음을 잘 짓는 거, 평소에, 그게 공양입니다. 내가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조금 마음을 더 해야지, 아픈 사람에게 가서 내가 한번 아픈 거를 치료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 행동을 실천을 해야지. 그리고 세 번째는 가난하고 외로운 자들을 도와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내가 공덕을 짓는 일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세요. 우리가 이제 평소에 그런 마음을 잘 지어야 되겠죠. 외로운 사람을 돕기 위해서, 잘 위로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줘야 됩니다. 그게 보통 사찰에서, 우리 마음의 정원 진관사도 보면은 이 세 가지 일을 다 하죠. 세 가지 일을 다 합니다. 지역사회에 활동을 통해서 다 하죠.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가 뭐냐 그러면, 바르게 수행하는, 바르게 수행하는 수행자들을 잘 공양해야 된다,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그것이 최상의 공덕이다. 이 네 가지를 잘 실천하는 것이, 네 가지 전부 다 수승하지만 이 중에 한 가지라도, 어머니가 가시고 49재가 됐으니, 100일 안에, 내지는 1년 안에, 3년 안에 이 중에 한 가지라도 실천하면 그 마음이 오롯하게 어머니에게 전달되고, 그 어머니는 흔연한 마음으로 또 가벼운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좋은 세계에 인연 맺고, 또 다시 우리 곁에 모습은 다를지언정 좋은 마음의 씨앗을 가지고 우리 곁에 올 거다. 저는 그거를 확신합니다. 우리가 오늘 이 49재를 거룩하게 이렇게 봉행하는 그 공덕으로, 어머니가 우리 곁에 분명히 오시는데, 더 좋은 마음, 더 좋은 복락을 가지고, 우리를 도와주는 인연으로 오실 거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중요한데, 마지막으로 이거는 꼭 해야 됩니다. 뭘 해야 되냐 그러면, 어머니의 후손들이 본인의 마음을 관찰하는 연습을 오늘부터 해야 돼요. 본인의 마음에 거울을 만들어서, 그 거울에 남편도, 자식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니고, 본인의 얼굴을 비춰보는 연습을 해야 돼요. 근데 우리는 일생동안 마음의 거울에 맨날 남의 얼굴만 비쳤어요. 잘한다, 못한다. 그러니까 마음이 점점점 걸어지고 거칠어지고 울퉁불퉁해지고, 때로는 마음에 뾰루지도 나고 곪기도 하고 그러다 어떻게 돼요? 터져요. 그러니 그거를 방지하려면, 오늘부터는 내 마음의 거울을 만들어서, 그 거울에 자신을 잘 비추는 거예요. 그래서 나를 자꾸 보는 연습을 하면, 그리고 그 보이는 내 모습에 내가 스스로가 자꾸 칭찬하고 잘하고 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던 네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실천하는 것이 어머니를 도와주는 거다, 그런 생각을 지어야 되고, 마음을 지어야 되고, 또 하나는 그 비춰진 그 본인의 모습으로 형제 간에 특히 직계 형제 간에 다툼을 하면 절대로 안 돼요. 다툼을 하면. 혹여라도 서운한 게 있고 또 마음에 맺힌 게 있다 하더라도, 이걸 통해서 다 풀어야 됩니다.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고 얘기하는데, 반대로 조상님이 좋은 데를, 우리 선망 부모들이 좋은 데를 못 가는 이유는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자꾸 다투기 때문에 그래요. 이거는 철없을 때는 몰랐는데, 자식을 키우고 나도 이제 제 아들, 딸도 있고 손자, 손녀가 있는 나이쯤 되면 그걸 알아요. 근데 그걸 아는데 이미 그때 되면 마음의 연습을 안 해가지고 마음이 이렇게 좁아져가지고, 마음의 문이, 아는데 이해가 안 돼요,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요. 알긴 아는데. 그래서 지금 말씀드렸던 연습은, 마지막에 마음의 거울을 만들어서 그 마음의 거울에 나를 자꾸 비춰보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나이가 먹을수록 마음이 넉넉해지고 여유 있어지고 커져야 되는데, 그걸 안 하니까 마음이 밴댕이 소갈딱지가 돼가지고, 밴댕이 속이 밴댕이도 작은데 밴댕이 속은 얼마나 작아요, 거기다 딱지예요. 얼마나 작겠어요?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같은 형제들끼리도 요만한 게 실수하거나 요만한 게 마음에 안 들어도 용서가 안 돼, 용납이 안 돼,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자, 이제는 어머니를 보내드릴 시간입니다. 이제 눈물이 아니고, 슬픔이 아니고, 이제는 우리 기존보다 더 좋은 인연으로 좋은 마음에 그런 복덕의 종자를 안고 우리를 도와주러 올 어머니를 위해서 극락왕생을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고 발원하고 그것이 진정한 어머니에 대한 천도입니다. 이제 슬픔의 눈물을 닦고, 그리움의 눈물도 닦고, 이제 축원의 눈물, 그리고 우리 발심의 그런 눈물로, 발원의 눈물로, 어머니가 좀 더 좋은 세상에 편안하게 계시다가 정말 큰 복덕, 공양을 가지고 우리 곁에 다시 오시라는 믿음을 갖고 천도하시기를 발원하면서, 오늘 말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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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3월10일 음력 2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도혜스님 2024-03-10
예. 오늘은 천수경의 구성 내지 관세음보살님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천수경은 대승불교를 수용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우리 불자님들의 신앙을 이끌고 가고 있는 중요한 경전이다>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매일 식탁에서 대하는 국과 밥과 같이, <우리의 마음과 신앙과 그리고 정신에 천수경은 스며들어 있다>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천수경은 <우리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대하는 경전>이기도 하지만, <대승불교의 전면적인 실천인 보현행해를 신앙의례화한 그러한 경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즉 <불교의 실체, 불교의 근본적인 사상과 정신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함축하고 있는 그러한 경전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분이 천수경을 독송으로 수행하는 우리 불자님들은 입으로만 다라니를 하고 불보살님들의 명호를 부를 뿐만 아니라, <경전에 나타나 있는 불보살님들의 크나큰 원력의 삶과 존재의 실상을 관찰하면서, 온몸으로 대승불교의 이러한 정신을 실천해 나가야 된다> 이렇게 봐야만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경의 구성을 보면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예배문, 그러니까 예배문은 이제 공경문이라고 볼 수 있죠. 그다음에 공양문, 그다음에 참회문, 발원문, 송지문 이렇게 다섯 가지로 편찬되어 있어서, 여러분들의 수행과 신앙에 그지없이 도움을 주는 그러한 경전이다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앞부분에서 대승불교의 실천적인 면이다 이런 말씀을 드렸는데, 그것은 대자대비의 사상이 주된 흐름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천수경은 관세음보살님의 밀의인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소개하고, 또 관세음보살님을 예찬한 그러한 경전이다라고 흔히들 말하고 있지만, 자세히 그 천수경 내용을 살펴보면 이 천수경 속에는 초심자가 알아야 되는 불교의 기본적인 용어와 또는 올바른 신행생활 이런 것들이 잘 꾸려져 있다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덕이 높은 큰스님들께서 불교의 모든 의식을 할 때 천수경을 독송하도록 한 것은 이 천수경이 신앙적인 기본 틀을 다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들이 불교 교리를 제대로 파악하고 알려고 한다면은 그동안에 여러분들이 갖고 있던 상식이라든가 지식이라든가 이런 것을 다 내려놓아야 됩니다. 자기가 여태까지 자기 생각대로, 자기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사상이라든가 인생관이라든가 또는 자기 주의, 주장을 가지고 불교를 비교한다든가 또는 합리화를 시켜버리면은, 그러한 것 때문에 불교의 진정한 내용을 파악하고 알아가는 데 장애가 돼서 잘 알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를 알려고 한다면은 자기 자신이 어린애가 되어서 아주 호기심 많은 눈으로 바라보고 또 귀중한 보물을 구경할 때처럼 집중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불교를 대해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불교는 모든 상식, 일반 상식을 뛰어넘은 그러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불교를 접해서 배운 그러한 것을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삶에 적용을 해본다면 여러분들이 아름답고 훌륭한 삶의 길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게 될 겁니다. 그래서 불교를 믿는다 신행한다, 이러한 모든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서 근본적으로 있어야 할 것이 뭐냐 하면은 중생의 이익입니다. 이 이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물질적이거나 조건적인 것을 떠나서 근원적으로 이익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근원적으로 이익이 된다’라는 이 말은 무슨 소리냐. 여러분이 기도를 해서 가피를 체험하거나 못하거나를 떠나서, 여러분들 자신이 여러분들의 영성이 맑아지고 또 향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님은 대자의 상징이시고 또는 큰 서원을 갖고 계세요. 이 서원은 어떤 서원이냐 하면<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없애주고, 중생들에게 모든 즐거움을 주시겠다>라는 서원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서원을 통해서 지금 현재 여러분들이 많은 이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이익은 어떤 이익들이냐.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을 없애주고, 두 번째는 여러분들이 죄를 짓는 데 가장 핵심적인 욕심을 여의게 해주고, 세 번째는 여러분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또는 바라는 모든 것을 얻도록 해주신다 이 말이죠. 그런데 참 오묘한 일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을 한 번 부를 때마다 여러분들의 세포 하나까지 다 회복이 돼요. 왜 그러냐 하면은 우주 만물 전체가 전부 다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현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중생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을 이제 좀 한번 짚어본다면은, 그중에서 이제 우비고뇌(憂悲苦惱)가 있는데, 그것을 이제 7가지로 통틀어 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화난(火難), 화재가 난다든가 이런 것이고, 그다음에 두 번째는 수난(水難), 세 번째는 풍난(風難), 네 번째는 악귀난, 귀신으로 통해서 고통받는 거, 그다음에 다섯 번째는 도장난입니다. 이 도장난은 폭력이에요. 그다음에는 이제 가쇄난(枷鎖難)인데 가쇄난은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갇힌다거나, 수갑을 찬다든가 하는 이런 종류가 가쇄난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일곱 번째는 원적란인데 도적의 난을 입는 거, 이게 이제 7가지로 중생의 고통을 총괄을 한다면 이렇게 7가지로 총괄을 할 수가 있는데, 이 모든 고통들이 무엇 때문에 생겨났느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있는 탐진치 삼독이라는 마음 때문에 이러한 고통이 생겨나고 여러분들은 많이 힘들어하고 어려워하고 있죠. 그리고 이제 중생들이 또 바라는 게 있죠. 바라는 것은 돈을 많이 벌어서 경제적 자유를 누리고 싶고, 또 이제 뭐 좋은 자식, 좋은 아들, 좋은 친구, 좋은 스승, 수도 없이 많은 그러한 소원과 바램들이 아마 여러분 가슴속을 들여다보면 수천만 개나 아마 넘을 겁니다. 그러한 이제 소원들이 다 있는 것을 관세음보살님은 다 얻게 해주신다 그 말이죠. 그렇다면 이 관세음보살님은 어떻게 무슨 신통이 있어서 또 우리를 그렇게 구출할 수 있냐 이 말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의 성품, 그것은 나에게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성품이 다 잠재되어 있어요. 그래서 내가 관세음보살을 부른다는 것은 내 몸속에 잠재되어 있는 관세음보살의 성품, 즉 부처의 성품을 드러낸다는 그러한 뜻입니다. 그래서 부처의 성품을 드러낸다라고 하는 것은 뭘 말하느냐. 내 몸속에 있는, 즉 내 몸속에 잠자고 있는 부처님을 깨어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님을 함으로 인해서 내 몸속에 있던 지혜가 발동이 돼서 어떤 위난에 처해서도 그 위난을 헤쳐나갈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난다는 거예요. 그 능력이 바로 관세음보살님의 능력이다 이 말이죠. 그 능력은 여러분이 다라니를 염불하는 공덕으로 내 몸속에 잠재되어 있는 관세음을 깨어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내 자신에게 있는 내 스스로의 관음을 깨어나게 해서, 일깨워내어서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을 성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첫 번째로 인식하고 여러분들 마음에 새겨야 됩니다. 그러면은 다라니를 어떠한 마음으로 해야 할 것인가. 첫 번째는 다라니 하는 것을 내가 의식을 하고, 두 번째는 나의 소리를 내 귀로 듣는 것을 의식을 하고, 이 두 가지를 전체적으로 의식하는 그 존재를 다시 한번 의식을 한다면은 지극한 염불이 되고 여러분의 의식이 초의식이 됩니다.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 첫 번째 다라니를 하는 내가 의식을 하고, 두 번째 나의 소리를 내 귀로 듣는 것을 의식을 하고, 이 두 가지를 전체적으로 의식하는 그 존재를 다시 한번 의식을 한다면은 지극한 염불이 된다. 그리고 내자신이 초의식이 된다. 이것은 문훈문수(聞薰聞修)라는 것입니다. 문훈문수가 무엇이냐. 능엄경에서 나오는 말씀인데, 부처님 당시의 제자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부처님 어떤 방법으로 수행을 하면 가장 쉽고 가장 빠르게 힘을 얻고, 생사를 벗어나서 아라한이 되고, 부처님이 될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여쭈었어요.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 중에 우수한 수제자들 스물 다섯 명에게 “각자가 어떤 방법으로 공부를 했는지 발표를 해봐라” 그랬어요. 그래서 스물 다섯 명이 발표를 했는데, 이것을 이근원통(耳根圓通)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이근원통은 부처님께서 스물 다섯 분의 수행 방법을 듣고, 부처님의 지혜로 사바세계에 있는 중생들이 수행을 하는데 가장 빠르고, 가장 쉽고, 가장 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 주신 겁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제가 말씀드린 이 세 가지예요. 다라니 하는 거를 내가 의식을 하고, 나의 소리를 내가 듣고, 또 이 두 가지를 전체적으로 의식하는 존재를 다시 한번 의식한다. 여러분이 이제 이것을 한번 실천해 보시면 다른 생각이 중간에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끼어들지 못하고 한 생각이 꾸준히 이어가게 되면 바로 힘을 얻고 우리가 능력이 생기게 되죠. 그래서 지극정성으로 우리가 기도를 한다라고 하는 것은 뭘 말하느냐. 관세음보살이라는 분은 초의식의 경지입니다. 그래서 우주의 관세음보살이라는 뜻인데, 이 우주의 관세음보살님과 내가 통하려면 의식이 통해야만 우리가 성취를 할 수가 있겠죠. 그렇게 되려면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은, 제일 첫 번째가 입으로 칭명하라 이 말이죠. 입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든가, 아니면 다라니를 해라 입니다. 그래서 염념상속(念念相續), 염념상속,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생각 생각이 절대로 끊어지지 않고 하나로 모아지는 것, 이렇게 다라니를 하게 되면은 내 몸에 있는 모든 세포가 힘을 내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다라니를 물질적인 것으로만 하면은 기도의 효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해야 되는데, 이 영적으로 한다라는 이 말은 무엇이냐. 나의 마음을 어떻게 하고 해야 하며, 또는 이 우주적인 힘과 영적인 힘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내가 알게 되면은 나 자신이 관세음보살이 된다는 겁니다. 내가 관세음이 되었을 때, 내가 관세음보살님의 힘을 다 쓸 수 있는 거예요. 이런 원리가 있는데 여러분이 만약에 내가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타력적으로 관세음보살님이 나에게 와서 나를 도와주실 것이다. 이 타력적이라 소리는 내 바깥에 있는 관세음보살, 그러니까 나는 따로 있고 관세음보살님은 내 밖에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그런 마음으로 만약에 기도를 한다면 그 기도는 성취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진정으로 관음 행자가 된다면, 진정으로 여러분들은 우비고뇌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불이 났다, 근데 관음행자가 그곳에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혜가 생겨서 그 어려움 속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자신이 관세음보살님을 지극히 믿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동요되지가 않아요. 사람이 위급한 상황을 당하면 막 마음이 동요가 돼서 ‘어떡하면 좋나, 어떡하면 좋나’ 하다가 당하거든요. 그런데 마음이 차분해지고 동요되지 않아서 그 어려움 속에서도 지혜가 생겨난다면 피할 수 있는 이러한 것이 바로 관음의 가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제 이러한 관세음보살님인 것이 관세음보살님의 가피인데, 자기가 지혜를 내어서 그 어려운 과정을 피하는 도중에 자기를 도와주는 소방관이나 또는 자기를 도와주는 다른 여러분들이 있다면은 그 사람은 관세음보살님이 여러분에게 보내준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관세음보살을 여러분들이 이렇게 알고 접근해 간다면은 여러분이 하고 싶은 모든 일들이 다 성취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예문을 하나 들겠습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정말 부처님을 지극하게 신봉하고 오직 부처님만 의존하고 사는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근데 어느 날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물난리가 났습니다. 나서 이제 동네에 물이 차서 들어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제 동네 동장이나 이런 분들이 방송을 하면서 물이 동네에 자꾸 차 들어오니까 집 안에서 어서 피해라 그렇게 방송을 하고, 또 옆집 사람들이 얼른 피하라고 와서 문을 두드리고 하고 그런데도 이 사람은 피하지 않는 거예요. ‘나는 부처님이 도와주실 거야. 나는 부처님이 도와주시니까 안 피해도 된다’는 거죠. 그리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가 이제 동네 사람들은 다 피해서 도망가고 다 그랬는데, 고집 부리고 있다가 이제 물이 점점 차니까 결국은 이제 할 수 없어서 지붕 위에 올라갔습니다. 올라가서 이제 둥둥 떠내려가니까 구조원들이 보트를 타고 다가와서 얼른 이 보트로 옮겨 타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다른 사람 구하라고 나는 부처님이 도와주실 거니까 괜찮다”고 그러면서 안 옮겨 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물이 점점점 해서 이제 지붕이 점점 가라앉는 거죠. 그래 안 되니까, 이제 물살이 너무 세니까 보트가 구조를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헬리콥터가 떠서 또 이제 줄을 내려가지고 이 사람 보고 줄을 잡으라고 줄을 잡으라고 아무리 해도 나는 부처님이 도와주실 거니까 안 잡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됐을까요? 그것은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시면 아실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피하는 데 도움을 주는 그 사람들이 전부 다 관세음보살님이 보내신 분들입니다. 그 부처님의 도움으로 우리가 살아나는 거죠. 먼저 언젠가 제가 법문을 할 때 그랬죠. 그 봉은사에 나청호 스님이라는 분이 새벽 예불을 하는데, 어떤 여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서 쫓아나가서 그 여자를 구해줬던 이야기를 제가 드렸을 겁니다. 생각나실 거예요. 그런 것처럼 그 주변에 그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사람에게 관세음보살님께서 듣게 하시는 거예요.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는데 새벽 예불를 하는데 그 스님 귀에 그 소리가 들리겠습니까? 그건 관세음보살님이 듣게 한 겁니다. 그래서 가서 그 사람을 구제한 거예요. 이래서 여러분들이 신앙을 가지고 기도를 하고, 우리가 다라니 기도를 한다거나 또는 우리가 관세음보살님을 부르고 또는 천수경으로 통해서 기도를 한다거나 할 때, 이러한 부처님의 가피가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나고, 내가 또 어떤 것이 내가 가피를 입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만 됩니다. 그래야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또 부처님의 가피에 대한 것을 내가 직접 체험할 수 있고, 체험하게 되면 환희심이 나고 기쁘고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지금까지는 천수경의 구성이라든가 관세음보살님의 가피에 대한 것을 대충 말씀을 드렸고, 지금부터는 이제 본론으로 <정구업진언>으로 들어가 보겠는데요. 이 정구업진언은 <구업을 맑히는 진언이다>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이 진언이라는 부분은 학술적으로나 논술적으로나 여러분들에게 이야기를 하면 욜로(한쪽 귀) 들어갔다가 욜로 빠질 수가 있으니까, 그것은 이제 다음 언제 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면 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 구업에 대한 인과라든가 과보에 대한 것만 간단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구업이라는 게 참 무서워요. 어떻게 무섭냐 하면 우리가 이제 여러분, 그 천수경의 그 내용을 보면 십악업(十惡業)의 중간 부분에 다라니 끝에 나옵니다. 그렇죠. 그 십악업 가운데 보면은 죄를 짓는 것이 이제 신구의 삼업으로 짓는데, 신구의 신은 내 몸이에요. 몸으로 짓는 것이 세 가지고, 입으로 짓는 것은 네 가지나 됩니다. 그리고 뜻으로 짓는 것이 세 가지고. 그러면 이 입으로 짓는 게 더 많아, 많고 아주 무섭습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에 대한 예를 하나 들어보면, 부처님 당시 때에 미묘 비구니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정말 우리가 생각할 수도 없는 힘들고 어려운 고통을 겪다가, ‘정말 이제 내가 더 이상 살 수 없겠다, 죽어야 되겠다.’ 이러한 생각을 했을 때 문득 ‘부처님이라는 분이 계신다는데 한번 가서 뵙고 죽어도 되겠다’라는 생각으로 부처님께 귀의를 해서 아라한이 되신 분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미묘 비구니가 아라한이 된 뒤에, 자기 후배들에게 자기의 일을 이야기했던 그런 것들이 이제 지금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인데, 앞부분에 이 비구니 스님이 겪은 일을 다 이야기하려면 너무 길고 많아요. 그러니까 무엇 때문에 이 비구니 스님이 그런 험난한 일을 당했는지, 그 과거 전생의 이야기만 이제 해드리겠습니다. 과거에 그 어느 곳에 부자가 있었어요. 그랬는데 그 부자가 자식이 없어요. 여러분도 아마 연세 많으신 분들은 젊었을 때, 남자를 우선으로 하는 그러한 사상이 우리나라에도 참 팽배해 있었죠. 지금은 좀 많이 좋아졌습니다마는, 그런 것처럼 인도 같은 곳은, 자식이 없으면 그 사람이 죽고 나면 재산이 전부 다 나라에 환속이 됩니다. 그러니까 딸이든 아들이든 관계없이 자식이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이 자식에 대한 그런 생각이 대단히 큰 부분이었죠. 자식이 없으니까 이제 첩을 들여서 자식을 보겠다. 그래서 이제 첩을 들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첩이 들어와서 아들을 낳았어요. 그러니까 이제 첩이 인물도 이쁘기도 하지만은 젊기도 하고 아들까지 낳았으니까 얼마나 이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남편이 오직 첩밖에 몰라. 그뿐만이 아니에요. 온 집안 식구들이 시어머니로부터 시작해서 첩만 알지, 이 사람은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이 됐죠. 그러니까 이제 이 부인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지금 이렇게 소외된 것은 뭐 그렇다 하더라도, 나중에 이 아이가 크고 자기가 늙고 남편이 만약에 죽게 되면 그 재산이 전부 다 그 아들에게 갈 거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게 생각해 보니까 암담하거든요. 그러면 이러한 것을 피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생각을 해보니까 그 아이를 없애는 것이 딱 좋겠어. 그래서 그 사람이 긴 바늘을 구해가지고 아이의 이 숨골에다가 깊이 꽂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시들시들해지더니 한 달 만에 죽어버렸어요. 여기다(숨골) 꽂았으니까 겉으로 표는 안 나는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이 엄마 되는 사람이 누가 어떻게 애를 죽였는지 모르는 거야. 이 엄마가 생각해 보니까 그 본부인이 그랬을 확률이 100%다 이 말이에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본부인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본부인한테 와서 “당신이 내 자식을 죽였지 않냐” 이렇게 따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본부인이 뭐라고 했냐면은, “내가 만약 그 아이를 그렇게 죽였다고 한다면은 나는 어떤 재앙을 받느냐 하면, 내 남편은 뱀에 물려 죽고, 또 내 자식은 물에 빠져 죽거나 늑대에 물려 죽고, 또 나는 생매장이 되고, 나의 부모는 불에 타 죽을 것이다.” 이렇게 맹세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래도 당신이 나를 의심하겠느냐”이랬어요. 그렇게 무서운 맹세를 하니까 이 작은 부인이 “저렇게 맹세를 하는데 정말 죽였겠나”, 그리고 죽였다는 증거나 뭐 이런 게 하나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못 찾은 거야. 그때 그 부인은 자기가 이러한 선악의 과보에 대한 것이 정확하게 인과가 있다라는 것을 생각도 못하고,, 그렇게 맹세를 한 거죠. 근데 사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이 누구냐, 이 미묘 비구니의 전생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미묘 비구니가 “그 사람이 누군 줄 아느냐 바로 나다.” 그래서 출가하기 전에 지금 말한 그것을 고스란히 다 겪었어요. 말도 못하는, 지금 제가 말씀드린 이것보다 더한 고통을 겪었어요. 그리고 이 미묘 비구니가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나는 지금 다행히 부처님을 만나서 아라한이 되었지만, 지금도 나는 어떤 고통을 받고 있느냐. 뜨거운 바늘이 정수리에 들어왔다가 발끝으로 빠지는 고통을 24시간 365일 계속 받고 있다. 그래서 재앙과 복이라는 것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것을 분명히 알고 수행해야 된다.” 이렇게 미묘 비구니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구업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말이라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에요. 방망이나 이런 걸로 상대방을 때리면 물질적인 건데, 이 말이라는 것은 그냥 소리야. 소리인데 이 소리로 상대방에게 심한 욕을 한다든가, 상대방에게 충격을 주면 그 상대방이 쇼크사 할 수도 있고, 또 독한 말을 듣게 되면 그것이 가슴에 막혀서 평생을 고통받는 그런 경우가 허다합니다. 여러분도 상대방이 여러분에게 막 악독한 말을 한다든가 이러면 어때요? 아무렇지도 않나요? 그렇지 않죠. 속이 상하고 심지어는 화가 나서 막 생각지도 않은 행동을 하고, 이게 말의 힘이고 소리의 힘입니다. 그래서 이 구업이라는 게 참 무서운 거예요. 예를 들면, 상대방에게 “빌어먹을 놈” 이러면, 상대방이 빌어먹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빌어먹어. 상대방에게 “저 미친 놈” 이러면, 상대방이 미치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미쳐요. 그러니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야말로 몽둥이로 이렇게 하나 때리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게 이 말의 구업입니다. 그뿐만 아니죠. 누가 상대방에게 살살 말로 꼬시고 잘한다 이 말이야. 그러면 어떻게 홀딱 넘어가서 전 재산을 다 사기당하잖아요. 이 말이라는 게 이렇게 힘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바세계는 음성 교체예요. 음성 교체라는 것은 음성으로 전부 다 감정을 서로 주고받고 여러분이 지금 법문 듣고 있는 것도 소리로 듣잖아요. 이게 음성이잖아요. 이게 음성 교체입니다. 그래서 음성 교체로 이 사바 세계가 근본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소리로서, 잘못 소리를 내면 그것이 전부 다 나에게 되돌아옵니다. 근데 나갔던 말이 다시 되돌아올 때는 반드시 이자를 붙이고 와요. 그냥 오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은행에 뭡니까? 뭐 100원이라도 넣어놓으면, -100원 넣으면 이자가 안 붙겠지만,- 하여튼 쪼금이라도 붙잖아요. 그죠? 그런 것처럼 이 악한 것도 이자가 붙고, 착한 일을 해도 이자가 붙어서 돌아와요. 그러니까 이 구업이라는 거 정말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십악업 가운데에 망어(妄語)·기어(綺語)·양설(兩活)·악구(惡口)거든요. 기어는 비단결 같은 말이라. 상대방을 살살 비단결같이 해서 중매 서는 이런 분들은 그런 기어를 많이 하죠. 그래서 상대방을 잘못 결혼을 하게 만들면 그 사람이 평생을 망치는 거예요. 그죠. 이렇게 말이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구업에 대해서 굉장히 무섭다는 것을 인지를 하시고, 그래서 이 천수경 제일 첫머리가 구업을 맑히는 진언으로 시작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구업만이라도 먼저 맑히게 되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업 가운데 거의 3분의 1은 맑히고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뭐냐. <구업을 맑혀야 된다.> 아시겠습니까? 이것으로 오늘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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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법회] 3.1절 특별기념법회 및 (사)백초월스님 선양회 발족식 법문
문광스님 2024-02-25
안녕하세요. 문광입니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뜻깊은 자리에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백초월 스님 선양회가 이렇게 발족을 했습니다, 3.1절을 앞두고. 작년에도 3.1절에 왔었습니다. 와서 백초월스님 태극기에 대한 말씀을 드렸었는데, 올해 백초월 스님이 이제 80주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6월 29일 날이 추모재 날, 기일인데요. 그때 학술대회를 할 때 태극기에 대해서 연구를 더 해서 발표를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태극기가 이 진관사에서 나오기 전에는 백초월 스님을 아시는 분이 우리 여기 계신 김광식 교수님 정도 있었고, 스님들 몇 분 아셨지 전 국민이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죠? 예전에 제가 탄허 스님 연구를 했는데 스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나는 문곡성이 발달해 있다. 그래서 살아서보다 나중에 세상 떠나고 나서 더 유명해질 거다.” 이러셨는데, 그래도 탄허 스님은 생시에도 많이 유명하셨더랬죠. 근데 이 백초월 스님이야말로 정말 진정한 문곡성의 기운을 받고 새롭게 한국 땅에 현신하신 분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이 진관사의 역사에서부터 시작해서 너무나 드라마틱한 일이 2009년에 벌어졌고요. 그리고 그 일장기 위에 그려서 태극기를 만드는 그런 문화가 있었고, 그리고 그 뒤에, 40년대 이후에 그러한 태극기가 있다는 말씀은 들어봤으나, 3.1절 당시에, 3.1운동 당시에 그렇게 실제로 했다는 유물을 그대로 보여주신 게 우리 이 진관사의 칠성각에서 그대로 드러났지요. 희유한 일입니다. 우리 국민이 지금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될지에 대해서 한 번 더 경각심을 주고 있는 그런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이 들고요. 제가 오늘 우리 회주 큰스님께 그런 말씀 드렸어요. 이제 우리 진관사는요, 단순한 조계종 사찰, 서울에 있는 사찰, 그냥 불교의 절, 이런 게 아닙니다. 이제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을 찾고 있고요. 한국에 오게 되면 서울을 오게 되는데, 이 서울을 바로 보여줄 수 있는, 삼각산을 보여주고, 그다음에 여기에서 이 고려시대부터 시작해서 쭉 흘러왔던 역사들이 다 그대로 간직되어 있고, 조선시대 무학대사가 동서남북으로 이 수도를 수호하는 그런 절들 중 서쪽을 수호하는 진관사, 그렇게 벌써 임명을 받고 있었던 그런 엄청난 사찰이고요. 거기에다가 왕조 실록을 보면, 태조실록에 딱 보면 그냥 바로 처음부터 나옵니다. 수륙재 얘기가 나와요. 진관사 수륙재 얘기가 나오고요. 그리고 그런 부분들을 보면 이 진관사야말로 한국의 모든 우리 국민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사찰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게 어르신이었던 진관 스님께서 여기를 불사를 너무 잘해 주셔서 너무나 맑고 깨끗하고, 그다음에 지금 우리 회주 스님, 그다음에 주지 스님을 비롯해서, 여기 진관사에 계신 스님들이 너무나 도량을 맑고 깨끗하게 정리를 해주셔가지고 여기에 그냥 오기만 와도 그 자체로 마음이 쉬어지고 힐링이 되는 도량이 됐어요. 거기에 템플스테이 뿐만 아니라, 이제는 사찰 음식까지 명장이 계시고, 아주 엄청난 문화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회주 스님께 그랬습니다. 문화총림이라는 말을 좀 쓰면 어떻겠느냐고. 우리 불교에서는 선원, 강원, 율원, 염불원 이렇게 있으면 총림이라고 그러거든요. 근데 이제는 그야말로 진관사야말로 서울에 누군가 외국인이 온다면 이 진관사를 보면 한국의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한국 문화의 아주 결집체다. 그래서 문화 총림이 됐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런 도량에서 백초월 스님의 이런 태극기가 나오고 신문이 나오면서 우리 국민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김광식 교수님께서 이제는 건국 훈장을 받으실 수 있도록 우리가 일을 해야 된다고 말씀하셨고, 그다음에 태극기 기념관도 이제 마련을 해야 된다는 게 너무나 당연하신 말씀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 백초월 스님을 저도 이제 진관사에 오게 되면서 뉴스는 봤지만 자세히 몰랐잖아요. 그래서 김광식 교수님 책도 보고, 여러 사료들도 이렇게 찾아보고 하면서, 그냥 한마디로 딱 느낌이 어떠냐 하면요. 그냥 투신하신 분이에요. 그러니까 이 <사>라고 하는 거 일체 없고, 그냥 우리 민족과 우리 국가를 위해서 그냥 투신하신 분이다, 그렇게 보여집니다. 너무 행장이 잘 보이지 않고 그러셨는데, 일심교라고 하는 거를 만드셔서 일심회를 하셨다 그래요.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스님이 지리산 영원사에서 계셨었는데 그때에 스님이 강백이셨어요. 말하자면 저도 강사지만, 저처럼 그냥 공부하셨던 스님이었던 거예요. 근데 일제시대 때 스님께서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셨어요. 그것이 우리 땅에 있는,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께서 “모든 스님들은 다 나와라. 생명을 구제하라. 살아있는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그것이 가장 중요하지. 우리나라의 모든 이 백성들을 이렇게 포악하게 살생을 하러 온 저 왜적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생명을 구제해야 되니 나와라.”라고 하는 그런 방문을 날리셔서 사병 대사를 비롯해서 모든 분들이 한꺼번에 의승병이 돼서 나오셨단 말이죠. 그것처럼 그냥 정말 공부 잘하시고 훌륭하신 스님이, 선원장도 하시고 조실도 하시고 이러셨던 분이 갑자기 이렇게 나오셨던 거는 완전한 보살행이다. 보살행이라 생각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스님께서 청주의 용화사에 계실 때 화엄경을 보시다가, 화엄경의 대의가 통만법명일심(通萬法明一心), -여러분 많이 아시죠?- 통만법명일심이라는 구절을 보시고, -만법을 통설해서 일심을 밝힌다. 화엄경의 종지가 그거다.- 이 구절을 딱 보시면서 생각하신 게 “그러네. 일심을 가지고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면 우리가 해방이 될 수 있겠구나” 바로 그 생각을 하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일심 그러면, 불교는 모든 사상이 일심 사상인데, 대승기신론에도 일심이문(一心二門)이 있고, 일심 만법귀일(萬法歸一)도 있고, 모든 게 다 있잖아요. 근데 화엄경의 종지를 보시고 일심교 일심회를 만드셨다 그러니까, 스님에게는 화엄 사상이 일단 기본이 있으셨다. 그러면 스님이 그렇게 구국의 활동을 하신 건 전부 화엄의 보살행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그러니까 스님께서는 감옥에 계시다가 밖에 나오시게 되면 바로 그냥 독립운동 바로 하세요. 그러니까 여러분 저기 아시죠? 용산에서 출발하는 그 열차에 대한독립 만세를 써가지고 그냥 그걸로 의사를 하는 겁니다, 무조건 잡히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그때 같이 동참했던 박수남이라는 분이 계세요. 이분이 그때 그쪽에서 일을 하고 계셨는데, 그냥 일반인이라고 봐야죠. 근데 그분이 그 일로 스님하고 잡혀서 같이 일본 감옥에 들어갔는데, 고문을 받고 10개월 만에 그 다음 해 돌아가셨어요. 얼마나 심한 고문을 받았으면. 그러니까 요즘이야 감옥이 인권이 있고 하지만, 그때 일제시대 때 상상을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스님이 2년 6개월 서대문 형무소에 계시다가 출소하시자마자 바로 또 독립운동을 하세요. 바로 만주에 독립 자금을 보내셔서 체포되셔가지고 결국은 청주교도소에서 1944년 광복을 한 해 앞두고 6월 29일 날 순국하셨어요. 입적하셨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까 1944년에 입적하신 독립투사들이 많이 계세요. 만해 한용운 스님이, 참 이게 우연인가요? 한 살 차이가 나시는데, 만해 한용운 스님이 한 살 적어요, 초월 스님에 비해서. 똑같은 날 입적하셨어요. 1944년 6월 29일. 그래서 저기 백담산을 비롯해서 말이죠, 그때 추모재 합니다. 만해 한용운스님을. 이제 그 우리가 자료를 찾으면 좋겠는데 민족 독립 33인, 거기에 백초월 스님을 넣으려고 했다라고 하는 얘기도 나오고 있어요. 이제 우리가 이런 자료들을 찾아내서, 김광식 교수님 말씀하셨듯이, 용성 스님, 만해 스님이 민족대표 33인에 우리 불교계로 들어가 계신데, 백초월 스님은 정말 그 이상의 치열하게 정말 몸을 사리지 않으시고 투신하셨다. 몸을 그냥 던지신 분이신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정말 그야말로 스님의 이 정신이 이제 세상에 빛을 발하는 시절이 왔습니다. 문화총림 우리 진관사에 스님께서 많이 계셨대요. 마포 포교당에 있었는데 거기 왔다 갔다 하시면서 경전에 아주 잘 통하셨던 것 같아요. 지금 동국대 전신인 중앙학림에서, -명진학교 중앙 이렇게 불렀잖아요,- 그때 스님을 대표 강사로 초청을 하셨는데 영원사에서 불이 나서 못 가셨다 그래요. 그다음에 박한영 스님이 그 길을 가신 거예요. 그러니까 최고의 강백이셨던 거라고 보여집니다. 그런 분이셨는데 스님께서 이런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걸 보면 정말 거룩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여담을 하나 하자면요. 이순신 장군의 3부작 영화가 있죠. 명량 그다음에 한산, 노량이라고 이 영화 삼부작이 있는데, 우리나라 역대 최고 관객이 들어간 1700만 명이 넘은 영화가 명량이에요. 명량대첩. 그 감독님인 김한민 감독님이 불자라는 거예요. 저를 만나고 싶다고 그래서 한번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순신 장군 3부작이 끝났으니까, 이제 새로운 영화를 만드시고 뭐 해야 되는데, 제 유튜브도 보시고 하셨대요. 그래서 저 만났는데 한 10년을 이순신 장군 영화를 찍으면서, 이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같은 걸 보면서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렇게 살고 계셨고 어떻게 했느냐 이 행간의 의미까지 정말 보게 되더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말이죠. 굉장히 중요한 얘기들을 많이 들었어요. 그분이 불자인데, 여러분, 명량에 보면 그 스님들 승병 나오셨던 게 보여요. 불자이시기 때문에 그러셨던 거에요. 근데 여러분 최근에 남해를요, 이순신해라고 병기하는 운동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여러분 서명하실 수 있어요. 그 사이트가 있습니다. 그래서 국회에서 법안을 내서 그렇게 하도록 하는 걸로 지금 진행 중이에요. 이 단편적인 예, 여러분 우리 오늘 출범한 백초월 선양회가 이제 이런 일을 해야 됩니다. 모든 분에게 알려야 돼요. 모든 전 국민에게 알 수 있도록 알려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서해라고 부르는데 그게 공식 명칭이 될 수가 없대요. 중국에서 봤을 때는 동해니까 그래서 황해라고 한답니다. 그다음에 이제 우리 지금 동해라고 하는데, 일본 사람은 일본해라 그래요. 그렇죠? 독도가 자기 것이라 그러고. 여러분, 남해는 이순신 장군이 안 간 데가 없는 거죠. 그죠? 그래서 <전체를 그냥 이순신 해라고 이름을 붙이자> 이런 운동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굉장히 좋은 거 아니겠어요? 이제 앞으로 우리도 백초월 스님에 대한 이런 부분들을 연구를 좀 많이 해야 될 거라고 봅니다. 여러분 제가 김한민 감독님한테, 너무 연구를 많이 하셔가지고, 들은 얘기가 있어요. 뭐라 그랬냐면, 여러분 그 영화 보셨습니까? 노량이라는 영화 보시면 그 뒤에, 저도 감독님을 만나게 돼서 영화를 못 보다가 봤어요. 노량에 보면 이순신 장군과 마지막으로 싸워서 전사하실 때 그 나오는 인물이 백윤식 배우가 연기를 했는데 말이죠, 시마즈 요시히로라고 나와요. 여러분 우리가 가토 기요마사 그다음에 고니시 유키나가는 많이 아는데, 시마즈 요시히로는 잘 모르는데, 이 사람하고 마지막으로 이제 전쟁을 한 거예요. 이 사람이 뭐냐 하면, 우리가 이순신 장군이 종군을 하고 전쟁에 못 나가는 동안 우리 해군이 완전히 초토화가 돼요, -칠천량에서 그랬죠.- 초토화가 될 때 이긴 장군이라는 거예요. 근데 이 장군이 이순신 장군과 노량해전에서 너무 많은 피해를 입고 돌아가는 바람에 일본 역사가 바뀌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에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이런 자기 군사들이 있는데, 그중에 핵심 중에 하나가 시마즈였는데, 너무나 많은 피해를 입고 가다 보니까,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전쟁에서 지게 돼서 도쿠가와 막부 에도 시대가 열렸다는 거에요. 근데 시마즈가 가서 사쓰마 현에서 다시 살아나는 기운이 일제시대 메이지 유신을 하면서 일제를 만들어 낸 거예요. 정한론. 한국을 정벌하자. 우리가 그때 못하고 왔으니까 다시 가자, 이렇게 해서 그게 만들어졌고, 시마즈가 있었던 그 지역이 아베 수상의 지역구였대요. 그러니까 혐한이라든지, 한국을 정벌하자라든지 그런 것들이 거기서 이어지고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이 그렇게 혼을 내줬으면, 국가가 가서 큐슈 정도는 우리 걸로 한다 하든지, 또는 이제 다시는 침입을 못하게 한다는 걸 받는다든지, 이런 부분들을 정확하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걸 못하고 그냥 흐지부지 넘어가면서 우리가 다시 침입을 받는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 백초월 스님의 태극기는 굉장히 강렬한 자각을 지금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제가 예전에 조선통신사 기록을 봤는데, 일본에서 유교가, 성리학이 발전을 하다가 중간에 막혀요. 막혀서 이해를 잘 못 하고 있을 때 퇴계 선생의 글을 보고 이해가 됐다 그래가지고 굉장히 열심히 성리학을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조선에서 통신사가 가면 그 사람들이 이제 막 공부했던 사람들이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갔다 와서 임금에게 뭐라고 얘기하냐면, “저 야만적인 무력만 쓸 줄 아는 저 왜놈들이 이제 정신을 좀 차렸나 봅니다. 공부를 좀 하는 것 같아요. 이제 우리 쳐들어올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러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수준이 그래요. 너무 안일한 거죠. 아베의 할아버지가 조선 마지막 총독이었던 거 아시죠? 다시 이 땅에 우리에게 반드시 온다 그랬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땅을 왜 이렇게 노립니까? 우리는 일본에 쳐들어갈 마음이 없는데. 우리 땅이 너무 좋아요. 우리 땅이 너무 좋아요. 여러분 북한산 가보셨어요? 저런 바위산이 어디 있습니까? 전 세계에. 앉아만 있어도 기운을 받을 수 있는 저런 땅이 없어요. 일본은 그냥 묘를 쓰고 나면 도시혈이라고 해서 그래서 그냥 관이 떠내려가잖아요. 땅이 움직이는데. 그래서 다 화장하고. 우리 땅처럼 이렇게 좋은 땅이 없어요. 금수강산이에요. 그래서 늘 우리 땅을 다들 원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걸 잘 지켜내야 되는데, 그러려면 정신이 살아있어야 되고, 그리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지금 우리가 말이죠. 제가 요즘 한국학 에세이를 많이 썼는데 그랬습니다. 전 세계는 말이죠, 무력과 폭력의 역사였어요. 지배하고, 전체주의 식민지 만들고 이걸로만 그냥 전 세계 패권을 유지하면서 살아왔는데요. 이제는 무력의 시대는 끝났다. 물력의 시대가 왔다. 조선시대 때는 무를 숭상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문이 약했어요. 문약이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서 이만큼 국가가 발전했으면 그다음에 국방력이 있는 상황에서 문화로 가는 거죠. 문화. 문화의 힘으로 전 세계에 지금 우리가 한류라고 하는 엄청난 그런 상황을 보이고 있잖아요. 거기에 첨병 역할을 하는 곳이 여러분 진관사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우리 김광식 교수님이 건국훈장도 추서하고 그다음에 태극기 기념관도 만든다고 하시는데, 다음에 불자이신 영화 감독님을 보면, 백초월 스님 영화 좀 만들자고 하면 좋겠어요. 세상에서 책이나 이 정도 가지고는 이렇게 선양이 많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앞으로 여기에 진관사에 딱 보시다가 어느 감독님 오셨다 그러면, 빨리 어른 스님께 모시고 가서 영화 만들자고 해서 전 국민이 알아야 됩니다. 이런 분 전 국민이 알아야 돼요. 그리고 실제로 너무나 안 알려지셨던 어른이고 정신이 위대하다. 그러니까 그런 부분을 우리가 한번 생각을 해봐야 되겠습니다. 굉장히 상징적입니다.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이렇게 그렸다는 거는 마치 말이죠, 주역에서 무극이 태극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에요. 무극이라고 하는 건 원상 하나만 있는 거예요. 원상 하나만 있는데 이게 태극이 됐다는 건 음양이 갈라졌는데 이 태극이 반으로 그냥 잘라진 것이 아니라 서로 갈마들고 있죠. 그다음에 상극인 것 같지만 상생하고 있단 말이죠. 이 세상의 모든 건 음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 몸도 그렇고, 우리 마음도 그렇고, 항상 음양을 왔다 갔다 하고 있죠. 그래서 이 음양이라는 세계에 살고 있지만, 음양이라는 세계를 벗어나는 세계가 바로 이게 도의 세계라 그래요. 그러니까 여기 진관 스님 계실 때 국수 먹으러 많이 오셨던 우리 탄허 스님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유불(儒佛)을 회통해서 태극을 깨닫는 것을 각이라 한다” 그러셨어요. “태극을 깨닫는 걸 깨달음이라 그러고. 태극이 뭔지 아는 걸 깨달음이라” 그랬어요. “음양인 것 같은데 세상의 모든 게 다 갈라져 있어요. 세상의 모든 게 결국 이분법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는 사유를 하는데, 그것이 결국 둘이 아니라 궁극적인 하나라고 하는 걸 아는 것, 태극을 아는 것을 각이라 한다.” 스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이 일본이라고 하는 일장기 안에 태극을 다시 그렸고 괘를 그렸다고 하는 거는 원리적으로만 있는 도의 세계를 현실적으로 등장시켰다, 이런 의미를 가지는 거죠. 여러분, 우리 한국의 태극기가 전 세계 국기 중에 제일 어려운 것 중에 하나예요. 이 태극기라는 걸 깨닫는 거예요. 이만큼 힘든 그런 진리가 있으나 이건 엄연한 완벽한 진리다. 그다음에 이 태극기라고 하는 걸 봤을 때 우리 국민들 모두 그렇고 우리 진관사의 신도분들도 그렇고 다 그러실 겁니다. 가슴이 뭉클하죠. 가슴이 뭉클합니다. 그래서 초월 스님은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고 계신 것 같아요. 우리 한국이요, 위기에 강합니다. 위기에 강한데, 위기에만 강해서 되겠습니까? 위기 아닐 때 우리가 정말 제정신을 차리고 정말 방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이제 전 세계의 문화의 중심이 되고, 전 세계 사람들이 이제 한국을 알기 시작을 했는데요. 지금 10대, 20대, 30대까지 한류라고 하는 걸 통해서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문화를 익히고, 한국에 찾아오기도 하고, 이렇게 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는데, 이것이 그냥 그냥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 사람들이 앞으로 40대, 50대, 60대가 되면 그 나라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지 않겠어요. 전 세계에 있는 모든 나라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다 한국을 잘 아는 사람, 한국어로 된 노래를 들어봤고, 영화를 본 사람들이 이제 전 세계 대통령도 하고, 장관도 하고 이러는 시대가 앞으로 올 거예요. 그런다고 했을 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모르고, 우리의 민족혼 그다음에 우리의 어떤 한국의 정신을 모른다고 하면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이제 이 백초월 스님이라고 하는 분에 대해서는 우리의 궁극적인 어떤 한국 문화의 정점으로 발전시킬 생각을 해야 되고요. 스님의 사상이나 이런 것들을 발굴을 많이 해내고, 그다음에 선양도 많이 하고, 그리고 그와 아울러 이 진관사에 왔을 때 “정말 이런 곳이 한국이구나, 한국이 원래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구나”라고 하는 걸 알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제가 조선 유학을 연구하다가 그냥 출가했어요. 조선 유학 공부. 너무 성리학 공부하다가 그냥 출가했어요. 여러분, 좀 답답했어요. 동인, 서인 나눠져 있다고요. 동인이 남인과 북인이 되고, 서인이 노론, 소론이 됐어요. 그래서 서로 토론하는 거 너무 좋죠. 의견이 갈라질 수밖에 없죠. 마치 말이죠, 무극이 태극됐다가, 태극이 양의가 돼서 음양이 됐다가 음양이 사상이 됐는데, 지금 모든 세상의 세부 분열도 이와 같이 하잖아요. 그건 당연한 일인데 항상 근본을 생각해야죠. 근본은 일심이에요. 백초월 스님이 일심 사상이야. 나는 앞으로 이제 이걸 일심 사상이라고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독립을 일심으로 하면 독립이 되겠구나, 독립 운동을 하셨던 것은 우리가 이런 좋은 땅을 유지하려면 일심이 돼야 된다는 메시지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말이죠, 서로 서로 싸우다가 조선 말이 되면 또 나눠져서 싸웠어요. 여러분, 아관파천 후는 친러파잖아요. 그죠. 임오군란이 일어나니까 그냥 청나라 데려와서 친청파잖아요. 서재필이나 이런 분들은 또 친미파잖아요. 김옥균이나 이런 분들은 갑신정변을 일본을 등에 업고 친일을 했잖아요. 근데 우리 자체가 더 중요한 거죠. 우리 한국인이 아무리 서로 토론을 하고 의견이 분분해도, 궁극적인 목적은 같은 한국이 하나 되기 위한 거에 궁극적인 방점이 달려야 되는데, 어느 나라를 등에 업고, 나는 저 사람 되는 거는 못 보겠다, 이런 거는 문제가 있는 거 아니겠어요? 지금 예를 들면 아까 여기 정치하셨던 국회의원분들 많이 오셨는데 그런 거잖아요. 여러분 친A, 반A 이런 거 있잖아요. 친박, 비박, 친문, 비문 하듯이 이런 것들은 여러분 조선조에 있었던 우리의 문제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증거예요. 그렇잖아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결국은 태극기 하나에 다 어울러 있듯이, 그다음에 일심으로 화합이 돼 있듯이, 그러지 않으면 또 위기가 온다는 메시지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 너무나 많이 봤는데, 임진왜란 때도 봤고, 병자호란 때도 봤고, 그다음에 일제도 봤고, 그래서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구하고, 이렇게 해서 많은 국민들이, 백성들이 희생을 하고 해서, 지금 이렇게 꿋꿋하게 살아왔던 그 우리의 힘으로, 이제 한류라고 하는 걸 전 세계에 알리면서 한국이 이만큼까지 왔습니다. 근데 이제부터는 그야말로 이러한 메시지를 역사에 우리 교훈들하고 새겨서 화합해야 됩니다. 저도 한국을 너무나 좋아하지만, 가장 안타까운 게 이분으로 나눠진 분열을 화합으로 만들어주는 원효의 화쟁, 회통, 그다음에 초월 스님의 일심 사상 이런 것이 앞으로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한국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이제 이걸 잘 해서 보여줘야 됩니다. 탄허 스님이 그러셨어요. 진관사에 자주 오셨던 탄허 스님이 “한국인이 하면 전 세계가 앞으로 따라한다. 대학생이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일어나서 정권이 바뀐 건 전 세계에 없었다. 우리 한국에서 그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전 세계 사람들이 그걸 따라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됐어요. 그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 바로 한국의 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앞으로 화합해야 된다. 화쟁해야 된다. 일심으로 나아가야 되겠다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보여집니다. 여러분 평상시에 늘 3.1절이 되고, 광복절이 되면 태극기를 달고 했는데, 저는 작년에 받아온 이 진관사 태극기를, -작년에는 조금 더 컸어요. 그렇죠. 종이가 더 컸습니다.- 저는 방에 부처님 옆에 딱 모셔놓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하여튼 민족주의가 좋아요. 근데 한국은 이 민족주의라는 게 단순한 국뽕이 아닌 것 같아요. 우리는 다른 나라를 침입해서 거기를 빼앗고 하는 그런 욕망이 없어요. 일본한테 그 정도 당하고 나면 말이죠, 어린애가 딱 그 역사책을 보고 나면 “저는 일본에 가서 총독을 한번 하겠습니다.” 이런 애가 나와야 되는데, 그런 사람 한 명도 없어요. 제가 아무리 만나봐도. 우리 땅이 그만큼 좋고, 평화를 사랑하고, 우리 한국인의 어떤 심성이 그러한가 봅니다. 대신에 다시는 이와 같은, 우리가 외세도 막아야 되겠지만, 우리 안의 분열로 인해서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 되겠다. 그것이 우리의 한국 정신으로서 일심의 정신으로 한번 피어나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갑자기 김한민 감독이 저를 다시 한 번 부르면, 이 진관사에 한번 모시고 와가지고 ‘좀 발심을 하게 만들어야 되겠다. 천만 관객이 한번 이걸 관심을 가지게 좀 해봤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이렇게 위대한 정신을 많이 알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하여튼 우리 원력을 세워가지고 이제 진관사에서 이렇게 백초월 스님 선양회가 발족을 했으니까, 어떤 형태로든 우리가 새롭게 초월 스님을 알리고, 스님의 독립 정신을 알리고, 진관사 태극기를 이제 다시 한 번 우리 국민들에게 아주 새롭게 선사하는 그런 시절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초청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저도 역시 앞으로 초월 스님의 연구를 잘하고, 한국이 위대한 정말 정신의 문명으로 우뚝 서는 날까지 더 열심히 연구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사진 : 은평구의회 박정묵주임님 / 진관사 청년법회 김명재법우님